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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념일(non-day) 운동과 일상 회복 담론
기념일이 넘쳐나는 시대, “오늘은 그냥 아무 날도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점점 더 자주 들립니다. 연인 기념일, 가족 기념일, 각종 캠페인 데이, 기업이 만든 ○○데이까지, 달력은 ‘특별함’으로 지나치게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개인과 커뮤니티는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날”, 즉 비기념일(non-day)을 선언하며 일상 회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①비기념일 운동이 등장하는 배경, ②비기념일이 제안하는 새로운 시간 감각, ③기념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실천 방식, ④일상 회복 담론과 연결되는 치유의 의미, ⑤기념과 비기념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균형점을 살펴봅니다.
1. 비기념일(non-day) 운동은 왜 등장했는가
기념일 과잉을 경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 “또 챙겨야 해?” 하는 피곤함
- “이 날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라는 압박감
- "다른 사람들은 뭔가 챙기겠지?
- “안 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 아닌가?”라는 불안
기념일이 원래는 삶의 리듬을 나누는 따뜻한 표시였다면, 오늘날에는 관계를 증명하는 시험, 소비를 촉구하는 장치, SNS에 자신을 전시하는 계기로 변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사람들은 “그냥 아무 의미 부여도 하지 않고 흘러가는 하루가 필요하다”고 느끼며, 의도적으로 “비기념일”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매일매일이 기념일인 현대 사회에서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비기념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비기념일 운동은 거창한 조직 운동이라기보다, 기념일 과잉에 대한 피로, ‘특별함’ 강요에 대한 반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여러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작은 저항의 징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비기념일이 제안하는 새로운 시간 감각
비기념일의 핵심은 “그날에는 어떤 의미도, 역할도, 수행 과제도 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1)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
이 날에는 연애를 증명할 필요도, 가족애를 과시할 필요도, 사회적 감수성을 SNS로 인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할 일은 먹고, 자고, 일하고, 쉬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뿐일 수 있습니다.
비기념일은 “의미를 부여해야만 가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새로운 시간 감각을 회복하려는 시도입니다.
2) 캘린더 바깥의 하루
우리는 스마트폰 캘린더, 알람, 기념일 알림 앱에 따라 하루의 중요도를 매기는 데 익숙합니다.
비기념일은 그 캘린더 바깥에 조용히 둥둥 떠다니는 하루 같은 것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는 질문에 “그냥 화요일이야, 그게 다야”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상상하게 합니다.
3. 기념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실천 방식
비기념일 운동은 대단한 이론보다 사소한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1) 일부러 ‘안 챙기는 날’ 정하기
예를 들어, 커플이나 친구끼리 “이 날은 서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날”로 합의하기, 가족끼리 “기존 기념일 중 몇 개는 선물·외식 없이 그냥 평소처럼 보내자”고 정해 보는 방식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말 몰라서 안 챙긴 것”이 아니라 “알고도 함께 쉬기 위해 안 챙기기로 한 것”이라는 합의와 설명입니다.
2) SNS 비접속·알림 끄기
비기념일에 SNS 알림을 끄고, 피드를 보지 않고, 메시지 답장을 조금 늦춰도 되는 날로 규정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남들이 어떻게 기념했는지를 보며 자신을 비교하는 일, ‘좋아요’와 댓글을 신경 쓰는 일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습니다.
3)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날”을 허용하기
현대 사회는 휴일조차 생산적인 자기계발, 감정 관리, 건강 관리를 위해 사용하라고 요구합니다.
비기념일은 “이 날만큼은 아무것도 건지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허락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의 통념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서 나 스스로에게 온전한 휴식이 필요한 하루가 필요합니다.
글을 남기지 않아도, 사진을 찍지 않아도,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없어도, 그 하루가 “그래도 괜찮았던 날”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4. 일상 회복 담론과 비기념일의 치유 기능
비기념일 운동은 코로나 이후 자주 언급되는 “일상 회복” 담론과도 연결됩니다.
1) ‘특별한 이벤트’ 대신 ‘평범함의 안도’
팬데믹은 우리가 누리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는 것, 마스크 없이 숨 쉬는 것, 집 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나가는 것 자체가 기념해야 할 일이 되어 버린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화려한 기념일보다 아무 일 없는 일상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을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비기념일은 이러한 욕망을 바탕으로 “이벤트가 없어도 좋은 하루”를 다시 긍정하려는 실천입니다.
2) 상처와 애도의 리듬 재정비
기념일은 때로 상실과 트라우마를 강제로 호출하기도 합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에게 가족의 날, 연인이 없는 사람에게 발렌타인 데이, 특정 사건의 피해자에게 연례 추모일은 감당하기 힘든 감정 폭풍이 되기도 합니다.
비기념일은 어떤 날에는 공적 기념 리듬에서 한 발 물러나 스스로의 속도로 상처를 돌보겠다는 선택, “집단적으로 기억하되, 개인은 각자의 리듬으로 애도할 권리가 있다”는 담론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3) ‘과잉 퍼포먼스’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쉼표
기념일이 퍼포먼스, 챌린지, 해시태그, 인증샷 경쟁의 장이 되었을 때, 언제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에게 정서적 과부하를 줍니다.
비기념일은 “항상 무엇인가를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집단적 쉼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5. 기념과 비기념 사이에서의 균형 찾기
비기념일을 단순히 “모든 기념일을 부정하는 운동”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질문은 이렇습니다.
- 무엇을, 왜, 누구와 기념할 것인가?
- 언제는 함께 기념하고, 언제는 쉬어갈 것인가?
- 어떤 기념일은 더 깊게, 어떤 기념일은 과감히 비워둘 것인가?
비기념일 운동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제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느끼는 날에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기념하고, 내 마음과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 날에는 조용히 비기념일로 보내는 것. 그 사이에서 관계의 경계를 조정하고, 소비의 압박을 낮추고, 감정의 속도를 나에게 맞추는 작업이 가능해집니다.
결론: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기념’이다
비기념일(non-day) 운동과 일상 회복 담론은 결국 이런 말을 건넵니다.
“모든 날이 특별할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하루를 온전히 허용하는 것 자체가 나와 우리의 삶을 존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매일을 이벤트로 만들라는 요구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숨을 고를 공간을 잃어버립니다.
비기념일은 기념을 완전히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기념의 속도를 늦추고, 기념의 대상을 가려보고, 기념하지 않는 자유까지 포함하는 더 너른 기념 문화를 상상해 보자는 제안입니다.
그럴 때 특별한 날의 기쁨도, 평범한 날의 안도도 서로를 갉아먹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