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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의 의례적 소비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의 의례적 소비

블랙프라이데이와 광군제(11.11)는 이제 단순한 할인 이벤트가 아니라, 전 세계 수억 명이 동시에 참여하는 ‘소비 의례’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람들은 새벽부터 줄을 서거나, 자정을 기다리며 장바구니를 갱신하고, SNS에 “올해도 질렀다”는 인증을 남깁니다. 마치 설날에 차례를 지내고,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꾸미듯, 특정 날짜에 ‘큰 장 보기’와 폭풍 쇼핑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의 연례 의식이 된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①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가 형성된 배경, ②이 날의 소비가 왜 의례적 행위로 작동하는지, ③플랫폼·브랜드가 이 의례성을 어떻게 설계·증폭시키는지, ④개인·사회·환경 차원에서 드러나는 그림자, ⑤의례적 소비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기준을 살펴봅니다.

1.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는 어떻게 ‘소비 의례’가 되었나

1) 단순 할인에서 ‘연중 최대 이벤트’로의 성장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에서 추수감사절 다음 날, 연말 쇼핑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라인 세일 관행에서 출발했습니다. “올해는 어떤 TV를, 어떤 게임기를 살까”가 가족 대화의 중요한 소재가 될 정도로 매년 반복되는 일종의 연례 행사입니다.

광군제(11.11)는 중국에서 ‘솔로데이’라는 비공식 기념일을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대형 쇼핑 페스티벌로 전환한 사례입니다. 이제는 24시간, 혹은 그 전후 며칠 동안 천문학적인 거래액이 기록되며 세계 최대 규모의 온라인 소비 의례로 불립니다.

처음에는 재고 소진·연말 세일의 실용적 목적이 컸지만, 현재는 “이 날은 원래 그렇게 쇼핑하는 날”이라는 문화적 기대와 관습이 형성된 상태입니다.

2) 반복과 참여가 만든 의례성
의례의 특징은 정해진 시기에, 비슷한 형식이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블랙프라이데이와 광군제도 매년 날짜와 이름이 같고, “카운트다운–장바구니 담기–자정 결제–배송 기다리기–인증하기”라는 비슷한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 반복은 “올해도 그날이 돌아왔다”는 감각을 만들어 내며, 쇼핑을 하나의 세속적 의례로 변모시킵니다.

3) 국가·문화 경계를 넘어 확산된 글로벌 소비 시즌
이제 미국 밖에서도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하고, 중국 밖에서도 11.11 프로모션을 합니다. 결국 각 국가 고유의 명절·기념일이 아니라, 글로벌 유통·플랫폼이 만든 ‘세계 공동 소비 시즌’이 생겨난 셈입니다. 이 날 사람이 몰리는 매장과 서버, 쏟아지는 택배 상자와 언박싱 영상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집단 의례 장면을 구성합니다.

2.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 소비는 왜 ‘의례’처럼 느껴지는가

1) “나도 참여해야 한다”는 압박과 기대
블랙프라이데이와 광군제 직전, 우리 주변에서는 이런 말이 자주 오갑니다. “이번엔 뭐 살 거야?”, “지난번에 못 샀던 거 이번엔 사야지.”, “그거 지금 사지 말고 11월까지 기다려.” 이미 쇼핑 계획을 해당 날짜에 맞춰 조정하고, 그 날을 기준으로 예산을 마련하며, 장바구니에 미리 담아 두는 행위 자체가 의례를 준비하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의례는 “참여하지 않으면 뭔가 빠진 느낌”을 주는데, 이 소비 시즌 또한 참여하지 않으면 손해 보거나 유행에서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을 유발합니다.

2) 미디어가 만든 집단 카운트다운
TV, 포털, SNS, 플랫폼 앱은 D-30, D-7, D-1 같은 카운트다운과 실시간 거래액, 주문량, 인기 상품 순위를 중계하듯 보여 줍니다. 이 정보들은 개별 소비를 넘어 “지금 모두가 함께 사고 있다”는 집단감과 열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결제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단순 개인 선택이 아니라 집단 의례에 동참하는 행위처럼 느껴집니다.

3) 정형화된 행동 패턴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 전후에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도 비슷해집니다. 사전 장바구니 채우기, 가격 비교·쿠폰 수집, 자정 직전 접속·로그인, 특정 시점(0시, 9시, 12시)의 타임딜 대기, 주문 후 배송 추적, 언박싱 인증 등. 이 반복되는 행동 패턴은 종교·전통 의례에서 제사 준비, 제물 진열, 절하는 순서처럼 정형화된 절차를 떠올리게 합니다.

4) 상징과 스토리의 축적
블랙프라이데이에는 “검은 금요일”이라는 이름과 줄 서서 TV를 들고 나오는 장면, 새벽 인파가 몰려드는 매장 이미지가, 광군제에는 11.11이 만들어 내는 ‘외로운 1’ 이미지와 플랫폼 본사 스튜디오에서의 카운트다운 쇼, 매출 기록을 발표하는 연출 등이 매년 반복됩니다. 이 상징들과 스토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축적되면서 “그 날 = 이런 이미지와 감정”을 자동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3. 플랫폼·브랜드가 설계하는 의례적 소비 구조

1) 의례를 위한 ‘무대’ 만들기: 라이브 쇼핑과 퍼포먼스
이커머스 플랫폼들은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를 거대한 ‘쇼핑 쇼’로 연출합니다. 유명 연예인·인플루언서가 참여하는 라이브 방송, 음악·댄스 공연, 행운 추첨, 게임 미션 등이 기념식·축제와 유사한 형식을 띱니다. 소비는 이 무대 안에서 “선물 받고, 즐기고, 참여하는” 의례적 몸짓으로 변합니다.

2) 참여 의례로서의 쿠폰·미션 구조
플랫폼은 기념일 전에 출석 체크, 게임 미션, 사전 예치금·예약 구입, 친구 초대 이벤트 등을 통해 사용자에게 “기념일 준비 과정”을 수행하게 합니다. 이 미션들은 단순한 마케팅 수단이면서도, 의례에서의 준비 기도·금식·장식과 비슷한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3) “작년보다 더”를 유도하는 서사
플랫폼과 언론은 “올해 거래액 ○○조 돌파”, “작년 대비 ○○% 성장” 같은 수치를 강조합니다. 이는 기업 실적 홍보이기도 하지만, 집단 의례의 강도를 점점 높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작년엔 TV 샀으니, 올해는 노트북?”, “지난 광군제 때보다 이번에 더 알차게 샀다”는 비교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4) SNS 인증 문화와 소비 퍼포먼스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 이후 SNS에는 박스 더미 사진, 언박싱 영상, “이 정도면 나 잘 산 거야?” 리뷰가 쏟아집니다. 인증은 단순 후기 공유를 넘어서 “나도 이 의례에 참여했다”는 퍼포먼스가 됩니다. 좋아요·댓글·리그램은 이 소비 행위를 하나의 소셜 이벤트로 승인해 주는 신호처럼 작동합니다.

4. 의례적 소비가 남기는 개인·사회·환경의 그림자

1) ‘계획된 소비’가 아닌 ‘의무감 소비’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 전에는 “이번엔 꼭 필요한 것만 사야지”라고 다짐해도, 실제 장면에서는 “지금 안 사면 손해”라는 기분과 주변의 소비 열기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이때 결제는 필요·욕구·예산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오늘은 원래 사는 날이니까”라는 의례적 의무감에 가까워집니다. 결과적으로 사용 빈도가 낮은 물건, 같은 기능의 중복 구매, 할인을 명분으로 한 과소비가 누적될 수 있습니다.

2) 소비 능력에 따른 소외감
의례는 모두가 참여하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 빚·부채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이 기간이 오히려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SNS에 “이만큼 샀다”는 인증이 넘칠수록 “나는 아무 것도 못 샀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뒤처진 느낌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3) 노동·물류·환경 부담의 급증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 기간에는 택배 물량 폭주, 야간·초과근무, 물류센터·배송 노동자의 업무 강도가 급격히 올라갑니다. 또한 포장재, 비닐, 완충재, 박스 등 일회용 쓰레기가 단기간에 대량으로 발생합니다. 소비자는 “싼 가격”과 “빠른 배송”을 기념하지만, 그 이면의 노동력 착취 가능성과 환경 부담은 의례의 장면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4) 기념일이 달력을 지배하는 구조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 같은 소비 기념일이 우리의 지출 계획과 생활 리듬을 점점 더 크게 좌우하면, 전통 명절·가족 모임·지역 축제보다 플랫폼이 정한 세일 시즌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되는 역전 현상도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념하며 사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5. 의례적 소비 시대, 우리는 무엇을 새로 기념할 것인가

1) ‘얼마나 샀는가’에서 ‘어떻게 샀는가’로 초점 이동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를 단순히 “1년에 한 번 미친 듯이 싸게 사는 날”로만 두지 않고, 평소 꼭 필요했던 것, 오래 쓸 수 있는 것, 환경·사회에 덜 해로운 것, 중소 브랜드·로컬 생산자를 돕는 소비를 집중적으로 선택하는 날로 의미를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같은 의례적 소비라도 “한 번의 큰 소비를 조금 더 책임 있게 하는 연습”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2) ‘안 사기’도 하나의 참여 방식으로 인정하기
소비 의례가 강해질수록 “이번엔 아무 것도 안 샀다”는 선택도 존중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SNS에서 장바구니 비우기 인증, “광군제 불참 챌린지”, “블랙프라이데이 대신 책 읽기·정리하기” 같은 역행 캠페인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의례는 모두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어떤 태도로 이 시기를 보낼지 선택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3) 플랫폼의 책임 있는 연출
플랫폼과 브랜드도 단기 매출뿐 아니라 건강한 소비·노동·환경을 고려한 기획이 요구됩니다. 예를 들어 과도한 ‘무제한·폭탄 세일’ 대신 계획 소비 가이드 제공, 배송 노동자 보호를 위한 배송 분산·지연 허용 캠페인, 친환경 포장·묶음배송 선택 시 추가 혜택 제공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조정은 처음에는 마찰이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브랜드 신뢰와 소비자 충성도를 높이는 전략이 됩니다.

4) 소비를 넘어 ‘관계’를 기념하기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 시즌을 가족·친구·동료와 서로의 필요를 점검하고 나누는 시기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쓰지 않는 물건을 함께 정리·기부하고, 서로에게 꼭 필요했던 것을 선물하며, 과거 충동 구매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면 소비 의례는 “더 많이 사는 날”에서 “내 삶과 주변 사람을 돌아보는 날”로 의미가 바뀔 수 있습니다.

결론: 거대한 ‘세일 의식’ 속에서 나만의 기준 세우기

블랙프라이데이와 광군제는 이미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소비 의례로 성장했습니다. 플랫폼과 미디어, 국가와 기업은 이 날을 중심으로 매출·트래픽·데이터를 설계하고, 사람들은 그 날을 기다리며 장바구니를 채우고, 결제와 인증을 통해 “올해도 이 의식에 참여했다”는 안도와 흥분을 느낍니다.

이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이제 이렇게 물어볼 때입니다. 나는 이 거대한 의례 속에서 어떤 기준으로 참여할 것인가? 무엇을 사느냐 못지않게 무엇을 사지 않을 것인지도 스스로 정하고 있는가?

의례적 소비 시대에 각자가 자신의 경제 상황, 가치관, 환경·노동에 대한 감수성을 기준으로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제를 “나의 소비 습관과 삶의 방향을 점검하는 날”로 재해석할 수 있다면, 이 거대한 세일 의식은 단순히 지갑을 여는 날을 넘어 우리 사회가 소비와 기념을 어떻게 다시 설계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