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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 기념일 논의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 기념일 논의

불법촬영과 디지털 성범죄는 한 번의 촬영과 유포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미 유포된 영상·이미지는 검색, 저장, 재유포를 거치며 수십 번, 수백 번 피해자의 몸과 이름을 다시 상처 냅니다. 피해자는 사건 이후에도 “현재진행형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수사·삭제·재판 과정에서조차 2차 피해를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는 여전히 ‘개인적 불행’이나 ‘선정적 사건’으로 소비되기 쉽고, 사회 구조와 제도, 플랫폼의 책임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납니다. 이 글에서는 ①왜 별도의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 기념일’을 논의해야 하는지, ②그 기념일이 지향해야 할 의미와 내용, ③피해자 중심 의제와 사회적 책임, ④교육·법·플랫폼·문화 차원의 활용 방안, ⑤실행 시 고려해야 할 윤리적 쟁점을 살펴보며, 이 기념일이 어떤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하는지 논의합니다.

1. 왜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 기념일’을 말하는가

1) 통계와 기사 뒤에 가려진 “지속되는 범죄”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는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촬영, 저장, 편집, 유포, 재유포, 협박, 거래까지 이어지는 연쇄 구조를 지닙니다. 그럼에도 사회에서는 “몰카 사건”, “유출 영상 파문”처럼 일회성 뉴스로 소비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념일 논의는 이 범죄를 “이때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구조적·지속적 폭력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출발점입니다.

2) 피해자에게는 오늘도 현재형인 폭력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영상·이미지가 인터넷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불안, 언제,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게 됩니다. 기념일은 과거의 사건을 추상적으로 떠올리는 날이 아니라,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피해”를 사회가 함께 직시하는 날로 기획될 필요가 있습니다.

3) 책임의 방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
기념일을 만든다는 것은 곧, “이것은 개인의 실수나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공적 의제다”라고 선언하는 일입니다. 가해자 개인뿐 아니라 플랫폼 구조, 수사·사법 시스템, 성과 몸을 소비하는 문화 전반에 책임을 묻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2. ‘기념’의 의미 재정의: 단순 추모를 넘어서

‘기념일’이라고 하면 과거를 기리는 행사, 꽃과 조문, 묵념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와 관련된 기념일은 다음 세 가지를 함께 담아야 합니다.

1) 추모: 이미 잃어버린 삶과 건강에 대한 예의
범죄로 인해 생명을 잃거나, 학업·직장·관계를 포기해야 했던 피해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의 삶을 사건 제목이나 익명 통계 뒤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기억하는 추모가 필요합니다.

2) 기록: 어떤 일이 어떻게 반복돼 왔는지 남기기
어떤 플랫폼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대응의 부재 속에서 유사 범죄가 반복되었는지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은 다음 사건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입니다.

3) 약속: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적 서약
기념일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구체적인 목표와 함께 확인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삭제 지원 시스템 개선, 수사·재판 기준 강화, 플랫폼 의무 강화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3. 기념일이 다뤄야 할 핵심 의제들

1) 피해자 중심 지원 체계 점검
기념일을 계기로 현재의 지원 체계가 실제 피해자에게 얼마나 닿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핵심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삭제 지원은 얼마나 빠르고 실효적인가?
- 상담·의료·법률 지원은 경제적 상황과 상관없이 접근 가능한가?
- 피해자가 신고와 동시에 2차 피해(비밀 누설, 비난, 책임 전가)를 겪지 않도록 제도가 설계되어 있는가?

2) 플랫폼과 기술 회사의 책임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는 플랫폼이 없으면 현재와 같은 규모로 벌어질 수 없습니다. 기념일은 각 플랫폼이 불법촬영물 탐지·차단 기술, 신고 대응 속도, 계정 제재와 재유입 방지 정책을 얼마나 개선했는지 정기적으로 공개·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3) 수사·사법 시스템의 한계와 개선
“증거가 없다”, “합의했을 수도 있다”, “처음 유포자가 아닌 재게시자는 처벌이 어렵다” 등 현실에서 피해자가 듣게 되는 말들은 사건 해결 의지를 약화시킵니다. 기념일에는 처벌 수위, 수사 인력·전문성, 국제 공조(해외 서버·플랫폼 대응) 현황을 사회적으로 논의하고 구체적 개선 요구를 모아야 합니다.

4) 젠더 권력과 성적 대상화 문화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는 “일부 일탈자”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성을 대상화하고 지배하려는 권력 구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념일은 단지 기술·법의 문제가 아니라 성평등, 동의, 존중에 대한 문화적 교육과 인식 전환을 주요 의제로 포함해야 합니다.

4. 기념일 운영 방식: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피해자 말하기”와 “사회 약속 발표”를 함께
피해자·생존자·유가족이 원할 경우,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동시에 정부·플랫폼·학교·언론·시민사회가 각자의 개선 계획과 실행 결과를 보고·점검받는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2) 연령·세대별 맞춤 교육 주간
어린이·청소년에게는 동의 없는 촬영·유포가 왜 범죄인지, 단체채팅방·커뮤니티에서의 방관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을 배우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청년·성인에게는 연인·지인 사이에서의 디지털 성폭력, “자발적 촬영”이라는 말 뒤에 숨은 권력 관계, 직장·대학에서의 신고·지원 시스템 안내 등이 중요합니다.

3) 언론·콘텐츠 가이드라인 발표
기념일을 계기로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 보도 준칙, 피해자 신상 보호 규칙, 자극적 표현 자제 원칙 등을 다시 확인·보완하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4) 기술·정책 성과 공유
삭제 기술 고도화, 신고 시스템 개선, 전담 인력 확대, 법 개정·제정 상황 등을 데이터와 함께 공개함으로써 기념일이 “실적 점검의 날”이 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5. 기념일 논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윤리

1) 피해자 얼굴·사건 소비 금지
기념일을 준비하면서 특정 사건의 세부 묘사, 피해자의 얼굴·신상, 자극적인 제목과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건을 알리는 것”과 “사건을 소비하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입니다.

2) 피해자의 “침묵할 권리”, “잊힐 권리” 존중
모든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이 공적으로 다뤄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는 “기억되고 싶다” 말하지만, 어떤 이는 “더 이상 내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랄 수도 있습니다. 기념일은 두 가지 요구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 설계가 필요합니다.

3) 특정 집단·사건으로만 환원하지 않기
특정 유명 사건만 반복해서 언급되면 그 밖의 수많은 익명의 피해자들은 다시 주변부로 밀려납니다. 기념일 논의는 다양한 연령·성별·계층·국적의 피해 경험을 함께 포함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4) 정치적 이용에 대한 경계
특정 정당·세력이 기념일을 자신들의 정당성 홍보 수단으로 삼거나, 서로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할 경우 피해자 중심 논의는 훼손됩니다. 기념일 운영 주체와 방식은 가능한 한 다원적이고, 피해자·전문가·시민사회의 참여를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결론: “기억하는 날”을 넘어서 “바꾸는 날”로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 기념일을 논의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범죄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어떤 책임을 누구에게 물 것인가?”, “피해자의 시간은 멈춰 있는데, 우리의 법·제도·문화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 기념일이 단지 슬픔과 분노를 확인하는 날을 넘어서, 피해자들의 생존과 회복을 위한 약속을 점검하고, 플랫폼·국가·사회가 구체적 변화를 내놓도록 압박하는 날이 된다면, 그날 우리는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조금은 덜 부끄러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법촬영·디지털 성범죄 기념일 논의는 하나의 날짜를 정하는 문제를 넘어, 디지털 시대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존엄, 그리고 폭력 없는 온라인 공간을 향한 사회 전체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