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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웹소설에서 그려진 기억의식 세계

웹툰·웹소설에서 그려진 기억의식 세계

장례식, 기일(忌日), 추모제, 위령제 같은 ‘기억의식’은 오랫동안 소설·영화의 중요한 장면을 구성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종이책이 아닌 웹툰·웹소설 플랫폼에서, 더욱 자유로운 상상력과 장르 문법 속에 독특한 기억의식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인물들이 과거를 떠나보내지 못해 만들어낸 비공식 추모 모임, 시간 루프와 회귀 서사 속에서 반복되는 기념일, 가상현실·게임 세계 안에서 열리는 디지털 제사까지. 이 글에서는 ①웹툰·웹소설이 기억의식을 다루는 이유, ②장르별 기억의식 연출 방식, ③캐릭터 서사와 트라우마 치유 장면으로서의 기능, ④디지털·가상공간에서 재구성된 새로운 의례들, ⑤기억과 팬덤이 연결되며 확장되는 2차 기억 문화, ⑥이 매체가 제시하는 ‘기억의식의 미래’ 의미를 살펴봅니다.

1. 왜 웹툰·웹소설은 기억의식을 자주 소환할까

웹툰·웹소설에서 장례·추모·기념일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건 단순한 서사 장치 이상의 이유가 있습니다.

1) 가장 쉽고 강렬하게 인물의 “과거”를 호출하는 방법
장례식장, 묘지, 기일 식사 자리, 위패 앞에 선 인물을 그리는 순간 독자는 “이 사람에게 중요한 상실이 있다”는 사실을 즉시 이해합니다. 짧은 컷·한 챕터 안에 긴 과거를 농축해 보여주기에 적합한 장면이 바로 기억의식입니다.

2) 연재 구조와 ‘기념일 에피소드’의 궁합
웹툰·웹소설은 회차가 쌓이는 구조라 “○년 전 오늘”, “사건이 있었던 그 날” 같은 기념일 에피소드를 주기적으로 배치하기 쉽습니다. 특정 회차를 기점으로 인물의 성장·관계 변화·복수/용서의 결심을 다시 정리하는 구조에도 잘 어울립니다.

3) 독자 경험과 맞닿는 감정 포인트
가족 제사, 추모식, 기념일 문화는 대부분의 독자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일상 장면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날의 공기와 분위기”를 공유된 감각으로 호출해낼 수 있습니다.

2. 장르별로 달라지는 기억의식 연출

웹툰·웹소설은 로맨스, 판타지, 학원물, 스릴러, BL·GL, 힐링물까지 장르가 매우 다양합니다. 장르마다 기억의식을 그리는 방식에도 차이가 생깁니다.

1) 로맨스·로맨스 판타지
죽은 연인·약혼자·배우자를 추모하는 장면은 현 연인과의 관계 갈등을 드러내는 장치로 자주 쓰입니다. 비 오는 날 묘지 앞은 “난 아직 그 사람을 완전히 보내지 못했다”는 메시지가 되고, 기일에 맞춰 편지를 쓰거나 케이크를 올리는 장면은 현재 연인이 그 모습을 보고 복잡한 감정에 빠지는 계기로 사용됩니다. 기억의식은 “과거의 사랑”과 “현재의 사랑” 사이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2) 복수·범죄·스릴러물
피해자의 위령제, 추모비, 사건 현장에 놓인 꽃과 메모는 범죄의 무게와 가해·피해의 구도를 강조하는 장면이 됩니다. 주인공이 매년 같은 곳을 찾아가 복수를 다짐하거나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은 서사의 동력을 유지하는 상징적인 장치입니다.

3) 판타지·이세계·귀환물
왕국의 전사 추도식, 용사·마법사 위령제, 멸망한 종족의 제사 등은 세계관의 역사와 정치 구도를 단숨에 설명하는 데 쓰입니다. 신·정령·조상 영혼이 직접 등장하는 의례 장면도 흔합니다. 제사 도중 신탁이 내려오거나, 죽은 인물이 “환영”이나 영혼의 형태로 대화에 참여하는 방식은 판타지에서 기억의식을 서사 핵심으로 끌어올리는 전형적인 장면입니다.

4) 학원물·청춘물
친구의 사고사, 학교 폭력 피해자, 졸업생 추모 등은 청소년기의 죄책감·무력감·성장을 동시에 다루기 좋은 소재입니다. 동창들이 오래 뒤에 교정의 작은 추모비, 사진, 나무 한 그루 앞에 모이는 장면은 “어른이 되어도 잊지 못한 과거”를 보여 줍니다.

3. 기억의식은 캐릭터의 트라우마와 성장 서사를 어떻게 만든다?

웹툰·웹소설에서 기억의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심리 묘사의 무대입니다.

1) 트라우마 재현 장면
추도식·제사·추모비 앞에 서는 순간 인물에게 플래시백이 밀려오고, 컷/문장이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편집됩니다. 웹툰에서는 패널 배경에 노이즈, 왜곡, 흑백 전환을 쓰거나 말풍선이 깨지는 연출로 기억의 파편과 공포를 시각화합니다. 웹소설에서는 “나는 다시 그날의 냄새를 맡았다”, “장례식장의 하얀 꽃과 형광등이 눈을 찔렀다”처럼 감각 묘사(빛·소리·냄새)를 통해 트라우마를 호출합니다.

2) 용서·수용의 전환점
초반에는 기일마다 오열하거나 누구 책임인지 집착하던 인물이, 후반부에는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이제는 나를 위해 살겠다”, “너를 기억하지만 여기서 멈추겠다”고 조용히 말하는 장면이 배치됩니다. 같은 기억의식을 반복하되 감정의 변화만 바꿔 보여 줌으로써 캐릭터 성장의 ‘전·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3) 공동체의 죄책감과 화해
마을·학교·조직이 과거 사건을 덮어둔 설정에서 뒤늦게 공식 추모식을 여는 전개는 ‘집단의 사과’와 ‘늦은 화해’를 상징합니다. 이때 기억의식을 준비하는 과정(기부 모금, 장소 선택, 문구 결정 등)이 관계 회복 서사의 큰 축이 되기도 합니다.

4. 디지털·가상공간에서 재구성된 ‘새로운 의례’들

웹툰·웹소설은 디지털 매체답게 온라인·가상현실·게임 세계 속 기억의식을 자주 상상합니다.

1) 게임 서버·가상현실 속 추모
게임 판타지·로그아웃 불가물에서는 사망한 유저나 NPC를 위해 길드가 인게임(in-game) 추모식을 여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기와 아이템을 ‘제물’처럼 버리거나, 캐릭터 아바타를 줄 세워 묵념하는 등 현실 의례를 변주한 디지털 제사가 구현됩니다.

2) 온라인 메모리얼 페이지·채팅 추모방
웹소설에서는 사고로 죽은 친구를 위해 채팅방을 닫지 못하고 “오늘도 다녀갔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인물, SNS 계정을 일종의 추모공간으로 남기는 등 디지털 기억의식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3) AI·홀로그램을 통한 ‘마주보기’
SF·근미래 웹툰·웹소설에서는 죽은 사람의 데이터를 모아 AI 챗봇·홀로그램으로 구현한 뒤, 기념일에 그와 대화하는 의식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핵심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은 진짜 그 사람인가, 데이터인가?”로 이동합니다.

4) 타임루프·회귀 서사와 ‘그 날’의 반복
회귀·루프물에서는 특정 참사·사고가 일어난 날짜가 일종의 ‘저주받은 기념일’처럼 설정됩니다. 주인공은 매번 그 날을 다시 겪으면서 누군가를 살리거나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기억의식이 “이미 지나간 날을 기억하는 의례”라면, 타임루프는 “같은 날을 다시 살아내는 극단적 기억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독자·팬덤이 이어가는 2차 기억 문화

웹툰·웹소설의 기억의식은 작품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팬덤의 기념문화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1) 작품 속 기념일을 ‘실제 달력’으로 끌어오기
주인공·커플이 처음 만난 날, 사건·참사가 벌어진 날, 인물이 죽거나 사라진 날이 팬들 사이에서 “○○데이”로 불리며 팬아트·짧은 글·트윗으로 기념됩니다.

2) 2차 창작 속 추모 에피소드
공식 작품에는 나오지 않는 장례식 뒤 장면, 남겨진 인물의 기일, 다른 캐릭터가 준비한 비공식 추도 모임 등이 팬픽·팬만화에서 많이 그려집니다. 이는 “공식 서사가 다 다루지 못한 슬픔과 애도”를 팬들이 직접 메우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3) 굿즈·후원과 연결되는 기억의식
어떤 팬덤은 작품 속 ‘기억’과 연관된 기념일에 실제로 기부·거리 캠페인·환경 행동을 벌이며 “서사 속 기억의식”을 현실 행동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6. 웹툰·웹소설이 보여주는 ‘기억의식의 미래’

웹툰·웹소설에서 그려지는 기억의식 세계를 정리하면, 몇 가지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1) 공식 의례에서 ‘사적인 의례’로
국가·종교가 주관하는 거대 의식보다 소수의 친구, 가족, 동료가 모이는 작은 기억의식이 중심에 놓입니다.

2) 장소의 변화: 묘지 → 골목길, 채팅창, 게임 서버
기억의 장소는 묘비나 제단만이 아니라 계단 복도, 옥상, 게임 맵, SNS 타임라인처럼 인물에게 의미 있는 모든 공간으로 확장됩니다.

3) “잊지 않기”에서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로
초반 서사는 “절대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하지만, 시간 속에서 인물들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 “기억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4) 기억의 주체가 바뀐다
전통 의례에서 기억의 주체는 어른, 국가, 종교, 가장(家長)이었다면, 웹툰·웹소설에서는 청소년, 여성, 소수자, 비주류 캐릭터들이 스스로 의식을 만들고 진행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결국, 웹툰·웹소설이 그리는 기억의식 세계는 “정해진 형식대로 치르는 제사·추모”를 넘어서 “각 인물과 공동체가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상실을 견디고 기억을 이어가는 실험”에 가깝습니다.

스크롤을 내려가며 한 컷, 한 챕터씩 따라 읽는다는 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의식에 조용히 동석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슬픔을 감당하는 여러 태도, 죄책감과 용서를 다루는 여러 방식, 디지털 시대에 새로 생겨나는 추모·기념 문화를 미리 시험해 보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