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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 기념의례
여성 살해와 젠더 기반 폭력은 어느 사회에서나 반복적으로 발생하지만, 쉽게 ‘사적인 비극’으로만 축소되거나 ‘개인 간 갈등’의 결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이름을 부르고, 거리와 광장에 꽃과 메시지를 놓고, 행진과 퍼포먼스를 통해 죽음을 기억하는 기념의례는 이 폭력이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차별과 권력 불균형의 결과임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이 글에서는 ①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을 기념하는 이유, ②거리 자발 추모와 상징물의 의미, ③공식 기념일·추모식과 국가·도시의 책임 인식, ④예술·퍼포먼스·행진이 결합된 페미니스트 기념의례, ⑤기념의례를 둘러싼 논쟁과 위험, ⑥폭력 종식을 향한 변화로 이어지기 위한 조건을 살펴봅니다.
1. 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 왜 ‘기념의례’가 필요한가
여성 살해와 젠더 기반 폭력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성별에 따라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구조, 여성과 성소수자를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문화, 피해를 사소화·침묵시키는 제도와 관행 속에서 반복되는 폭력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건이 “연인 사이의 다툼”, “가정 문제”, “개인의 일탈”로만 설명되며, 사회적 원인과 책임은 흐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기념의례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1) 피해자의 존재와 이름을 되찾기
통계 속 숫자, 익명의 ‘피해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름과 얼굴, 삶의 궤적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하게 만듭니다.
2) 사적인 비극을 공적 의제로 전환하기
집 안·사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이더라도 거리와 광장, 공공 공간에서 기억하는 순간 사회 전체가 책임을 나누어야 할 문제로 바뀝니다.
3) 침묵과 부인을 깨는 집단적 행위
“그냥 불운한 사건”이라는 해석을 거부하고, 구조와 제도, 문화의 문제를 함께 말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됩니다.
즉, 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 기념의례는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이 구조를 바꾸겠다”는 선언입니다.
2. 자발적 거리 추모와 ‘여성 살해’를 드러내는 상징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자발적인 길거리 추모입니다.
1) 꽃, 쪽지, 초, 리본으로 채워지는 공간
사건이 일어난 장소, 혹은 상징적인 광장에 꽃다발, 편지, 손편지 메모, 촛불, 리본 등이 놓입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당신 탓이 아니다”, “당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라는 메시지는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시선에 맞서는 집단적 응답이기도 합니다.
2) 검은 옷, 보라색 리본, 신발 등의 상징
검은 옷은 애도와 분노를, 보라색 계열의 리본이나 스카프는 성차별과 젠더 폭력에 맞서는 연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빈 신발, 빈 의자, 이름만 적힌 종이 등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부재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3) 피해자의 이름을 함께 부르는 의례
추모 집회나 문화제에서 사회자가 피해자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고, 참가자들이 함께 따라 부르거나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장면은 중요한 기념의례 중 하나입니다. 이는 익명화와 지워짐에 저항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이러한 거리 추모는 “이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도시와 사회의 기억 속에 새겨 넣는 작업입니다.
3. 공식 기념일·추모식과 국가·도시의 책임 인식
시간이 흐르며 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과 관련된 기념의례는 공식 기념일·추모식의 형태로 제도화되기도 합니다.
1) 도시·지역 차원의 추모일·추모주간
지방정부나 도시가 특정 사건이 일어난 날, 혹은 젠더 폭력을 기억하기 위한 날짜를 정해 추모주간·기념일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진행되는 것은 추모식, 토론회, 교육 프로그램, 걷기 행사, 캠페인, 전시 등입니다.
2) 국가 차원의 기념일과 정책 연계
국가 차원에서는 여성 대상 폭력 예방의 날, 젠더 기반 폭력 근절 주간 등 이름으로 기념일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날이 단순 캠페인 문구에 그치지 않고, 실제 예산과 정책, 법·제도 논의와 구체적으로 연결되는지 여부입니다.
3) 공식 추모식의 구성 요소
국가·지자체가 주관하는 추모식에서는 정부·지자체 대표의 사과와 메시지, 유가족·당사자의 발언, 전문가·활동가의 문제 제기, 공연·노래·영상 상영 등이 하나의 의례로 엮입니다. 이때 책임과 재발 방지 약속을 얼마나 분명한 언어로 말하느냐가 기념식의 진정성을 좌우합니다.
공식 기념일·추모식은 “이 사회가 이 폭력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자리가 됩니다.
4. 예술·퍼포먼스·행진이 결합된 페미니스트 기념의례
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에 맞서는 기념의례의 또 다른 축은 예술과 퍼포먼스, 행진이 결합된 페미니스트 의례입니다.
1) 거리 행진과 구호
참가자들은 도심을 행진하며 젠더 폭력과 여성 살해의 구조를 비판하는 구호를 외칩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다”, “밤길을 바꾸지 말고 사회를 바꿔라”와 같은 구호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문화를 거부하고, 공공 공간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메시지입니다.
2) 예술 퍼포먼스와 몸의 언어
춤, 연극, 플래시몹, 침묵 퍼포먼스 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분노, 두려움과 연대를 드러내는 수단이 됩니다. 예를 들어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다이인(die-in)’ 형태의 퍼포먼스는 “여기 쓰러진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우리 모두”를 상기시키는 의례입니다.
3) 페미니스트 예술과 추모 공간
전시, 사진 프로젝트, 영상 작업, 시와 노래 등 예술 작업은 사건의 구체적인 얼굴과 목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남깁니다. 이름이 새겨진 벽, 기억을 담은 벽화, 여성과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모은 아카이브 전시는 일종의 ‘기억의 사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기념의례는 슬픔과 분노를 ‘함께 행동하는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5. 기념의례를 둘러싼 논쟁과 위험
그러나 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 기념의례는 항상 긍정적인 효과만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체로 여러 논쟁과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1) 피해 재현의 방식과 2차 피해
일부 퍼포먼스나 보도, 기념 콘텐츠는 폭력 상황을 과도하게 상세히 재현하거나, 피해자의 사진·이름·사생활을 과도하게 드러내면서 유가족과 주변인에게 2차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2) 사건의 소비와 상업화
추모와 연대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브랜드·기관의 이미지 제고에 활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슬로건과 상품, 이벤트만 남고 구조를 바꾸는 실질적 행동은 없는 “기념의례”는 금방 신뢰를 잃게 됩니다.
3) 배제와 대표성 문제
일부 기념의례는 도시 중산층 여성, 주류 집단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이주여성, 장애여성, 성소수자, 빈곤층 여성의 경험은 주변부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이라는 단어 안에 포함되지 않는 다양한 존재들이 배제되는 기념의례는 젠더 기반 폭력의 복합성을 제대로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4) 정치적 갈등과 반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기념행사를 “과도한 피해자주의”, “남성 혐오”로 비난하면서 행사를 방해하거나 맞불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 결과 기념의례 현장은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와 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충돌하는 정치적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건강한 기념의례를 만들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존엄, 당사자와 주변인의 안전, 다양한 여성·젠더 주체의 경험을 세심하게 고려하는 설계가 필요합니다.
6. 기억에서 변화로: 젠더 기반 폭력 종식을 위한 기념의례의 조건
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 기념의례가 단지 “슬펐던 일을 한 번 상기하는 날”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1) 당사자·유가족·현장 활동가의 참여 보장
기념행사의 기획과 진행 과정에 유가족, 생존자, 여성·성소수자 인권단체, 현장 활동가가 실제 권한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상징만 그럴듯한 ‘위에서 만든 행사’가 되기 쉽습니다.
2) 정책·제도 변화와의 구체적 연결
기념일·추모식에서 구체적인 요구와 과제를 함께 제시하고, 다음 해 기념일에 그 실행 여부를 점검하는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호·상담 체계 강화, 사법 시스템 개선, 예방 교육, 미디어 보도 가이드라인 마련 등 구체적인 영역과 연결해야 합니다.
3) 교육과 공론장의 역할 강화
기념의례 전후로 학교·대학·지역 커뮤니티에서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교육·토론이 함께 이루어질 때, 기념은 단순한 행사에서 학습과 성찰의 기회로 확장됩니다.
4) 지속성과 유연성의 균형
매년 같은 형식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매번 완전히 다른 이벤트를 여는 것도 메시지의 축적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핵심 상징과 메시지는 유지하면서, 참여 주체와 표현 방식, 논의 의제를 조금씩 확장해 가는 전략이 중요합니다.
결국 여성 살해·젠더 기반 폭력 기념의례는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이면서, “살아 있는 우리가 어떻게 달라질지 서로 약속하는 자리”일 때 그 의미를 온전히 갖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