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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과 비정규직 의제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은 더 이상 “노동자들이 쉬는 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국제 노동절, 세계 안전보건의 날, 세계 괜찮은 일자리의 날 등은 21세기 노동 현실의 핵심 쟁점인 비정규직·플랫폼 노동·프리랜서·파견·하청 노동자의 삶을 드러내는 중요한 시간표가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①비정규직 확대라는 구조적 변화, ②대표적인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의 성격, ③이 날들이 비정규직 의제를 전면에 올리게 된 과정, ④국제 기념일이 정책·여론·연대를 움직이는 방식, ⑤행사성 소비를 넘어서기 위한 과제를 살펴보며,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과 비정규직 의제의 연결을 정리해 봅니다.
1. 고용이 ‘정상’에서 ‘불안정’으로 이동하는 시대
한때 많은 나라에서 ‘정규직 풀타임 고용’은 노동시장의 기준처럼 여겨졌습니다. 한 회사에 오래 다니며, 사회보험과 퇴직금, 일정한 임금 인상과 승진을 기대할 수 있는 모델 말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 세계화, 자동화·디지털화가 겹치면서 이 전제는 빠르게 흔들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기간제·단시간·파견·용역 노동, 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 노동(배달·운전·크리에이터 등), 간접고용·하청 구조가 노동시장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들은 흔히 “비정규직” 또는 “불안정 노동자”로 불리며, 낮은 임금, 해고와 계약 해지의 위험, 사회보험의 공백, 노조 가입의 어려움, 산재·재해 시 보호 부재 등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이처럼 비정규직이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된 상황에서,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이 무엇을, 누구의 현실을 중심에 둘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비정규직 의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2.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의 스펙트럼
노동과 관련된 국제 기념일은 생각보다 다양하며, 서로 다른 초점을 갖습니다.
1) 국제 노동절(5월 1일 계열)
노동시간 단축, 조직할 권리, 파업과 결사의 자유, 임금·안전·복지 개선을 요구해 온 가장 오래된 노동 기념일입니다. 최근에는 정규직·비정규직, 조직 노동·미조직 노동, 플랫폼 노동자·이주노동자가 함께 행진하고 목소리를 내는 장으로 확장되는 추세입니다.
2) 세계 안전보건의 날(산업재해·산업안전 중심)
작업장에서의 사고·질병·과로사·우울·스트레스를 줄이자는 날입니다. 건설·물류·서비스·플랫폼 배달 등 위험 작업에 많이 종사하는 비정규직·하청노동자의 현실이 이 날의 핵심 의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3)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를 주제로 한 날·주간
국제노동기구(ILO)와 각국 노동단체가 “임금·안정·권리·사회보장·사회대화”를 갖춘 괜찮은 일자리의 확대를 요구하는 날입니다. 여기서 ‘괜찮은’이라는 말은 단지 해고 위험이 없는 일자리뿐 아니라,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에게도 기본적인 권리와 안전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4) 아동노동·강제노동·인신매매 반대 기념일
이는 노동 착취의 극단적인 형태를 다루지만, 불안정한 지위의 이주노동자·비정규 노동이 어떻게 착취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념일들은 공통적으로 “노동은 단순한 고용 관계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과 권리의 문제”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그 안에서 비정규직 의제가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3. 왜 비정규직이 국제 기념일의 중심 의제가 되었나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이 비정규직 의제를 전면에 올리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흐름이 겹쳐 있습니다.
1) 숫자의 문제: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청년·여성·노인·이주노동자의 상당수가 비정규직 형태로 일합니다. “정규직이 중심, 비정규직이 주변”이라는 구도보다, “불안정 고용이 노동시장의 핵심 구조”라는 인식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2) 위험의 전가: 위험한 일, 힘든 일을 누가 하는가
건설·물류·청소·경비·배달·콜센터·돌봄·간병 등 위험하고 감정노동이 큰 업무는 비정규직·하청·플랫폼 형태로 외주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업재해·폭염·추락·장시간 노동·과로·감정 노동의 부담은 이들에게 집중됩니다.
3) 조직의 어려움: 노조와 제도 바깥의 노동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는 소속과 장소가 분산되어 있고, 근로자성(노동자 인정 여부)조차 부정당하기 쉽습니다. 이들은 노조 조직률이 낮고, 교섭 창구도 불안정해 자신들의 문제를 정책 의제로 올리기 더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4) 젠더·세대·이주의 교차
많은 여성은 결혼·출산·돌봄을 이유로 비정규 일자리로 밀려나고, 청년은 ‘첫 일자리’부터 불안정한 고용을 경험하며, 이주노동자는 불안한 체류 자격 속에서 과도한 초과근로와 저임금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의 구호는 점점 더 “노동자의 권리” 일반에서 “가장 불안정한 노동자의 권리”로 초점을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4. 국제 기념일이 비정규직 의제를 움직이는 방식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은 비정규직 의제를 단지 이론이나 보고서가 아니라, 현실 정치와 사회 여론 속으로 끌어들이는 도구로 작동합니다.
1) 가시화: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일하는가” 보여주기
행진·집회·캠페인을 통해 배달 노동자, 청소·경비 노동자, 콜센터 상담사, 학습지 교사, 간병·돌봄 노동자, 편의점·플랫폼 라이더 등이 직접 등장해 자신의 일을 설명합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사회의 눈앞에 가져오는 작업입니다.
2) 프레임 전환: 개인 선택이 아닌 구조적 문제로
“비정규직이라도 감사해야 한다”, “능력이 없어서 그런 일 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을 넘어, 기업의 외주·하청 전략, 국가의 규제 완화와 사회보험 설계, 글로벌 공급망의 가격 압박 구조 등이 비정규직 확대의 원인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3) 국제 규범과 연결: ILO 기준과 인권 언어
국제노동기구(ILO)의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안전보건, 사회보장 관련 기준은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최소선으로 제시됩니다.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은 “비정규직에게도 동일노동·동일임금, 안전보건, 사회보장권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국제 기준을 반복적으로 환기합니다.
4) 초국가적 연대와 캠페인
다국적 기업·플랫폼 기업 체제에서는 한 나라의 비정규직 문제를 한 나라 안에서만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국제 기념일을 계기로 각국 노동조합·NGO·시민단체가 공동 성명·공동 행동을 조직하고, 글로벌 공급망·플랫폼 기업을 상대로 동일 기준을 요구하는 연대가 형성됩니다.
5) 정책·기업을 향한 압박
국제 기념일에 맞춰 발표되는 비정규직 실태조사, 플랫폼 노동 백서, 산재·과로사 보고서 등은 최저임금·근로시간·사회보험·산재 인정 범위 확대,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의 법적 지위 재정의, 원청·플랫폼의 사용자 책임 명시 같은 정책 요구와 연결됩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ESG·사회적 책임”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국제 기념일은 하청 구조 개선, 안전 투자 확대, 플랫폼 알고리즘의 투명성 제고 요구를 강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5. 행사에서 구조 변화로: 남은 과제들
그럼에도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과 비정규직 의제 사이에는 여전히 여러 한계와 과제가 존재합니다.
1) 이벤트로 소진되는 위험
해마다 같은 장소, 비슷한 구호와 공연·행진으로만 반복될 경우 “또 노동절이구나” 하는 피로감만 남고, 실제로 비정규직의 임금·안전·법적 지위는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념일과 연동된 연간 로드맵, 입법·예산·단체협약 목표 설정, 다음 해 성과 평가가 함께 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
2) 대표성의 문제
비정규직이라고 해도 여성·청년·장애인·이주노동자·성소수자 등 서로 다른 집단의 경험과 요구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기념일 무대에 서는 사람과 언론이 주목하는 사례가 일부 유형에만 집중될 경우, 가장 취약한 집단의 목소리는 여전히 주변에 머물 수 있습니다.
3) ‘정규직 vs 비정규직’ 갈등 프레임 넘어서기
어떤 사회에서는 노동 관련 기념일이 “정규직의 특권을 지키는 날”처럼 비춰져 비정규직·자영업자·플랫폼 노동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비정규직 의제를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정규직의 조건을 낮추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최소 기준을 함께 끌어올리자는 방향으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4) 디지털 전환과 새로운 ‘보이지 않는 노동’
알고리즘에 의해 배차·평가·해고되는 플랫폼 노동, 집에서 일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재택 프리랜서, 콘텐츠·리뷰·데이터 라벨링 등 디지털 플랫폼 뒤에서 일하는 이들의 현실은 여전히 통계와 법, 기념일 담론에서 충분히 포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이 이들을 포함한 “새로운 비정규 노동”을 어떻게 다뤄낼 것인지는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결론: 비정규직의 눈으로 노동 기념일을 다시 보기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과 비정규직 의제를 함께 놓고 보면, 이 날들은 더 이상 특정 직종 정규직의 날, 과거 노동운동을 기념하는 역사적 기념일로만 머무를 수 없습니다.
오늘의 노동 현실을 기준으로 보자면,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에게 이 사회가 어디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가”를 묻는 날이 바로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입니다.
국제 노동절, 세계 안전보건의 날, 괜찮은 일자리의 날을 비정규직의 눈으로 다시 볼 때, 법·제도, 기업의 관행, 소비자의 선택, 시민의 연대 방식이 어디까지 달라져야 하는지 더 분명해집니다.
기념일 그 자체가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날을 비정규직 노동의 현실을 드러내고, 구체적인 변화 목표를 정하며, 다음 해를 약속하는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노동 관련 국제 기념일은 “하루짜리 행사”를 넘어 불안정 노동 시대의 방향을 제시하는 현대적 사회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