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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전 세계의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운 것은 어른이 아닌 청소년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기후위기 대응을 요구하는 학교 파업, 총기 폭력에 반대하는 행진, 인종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시위, 학교폭력·성폭력 피해자를 추모하는 작은 추모 공간까지, 이 모든 현상은 단지 ‘시위’만이 아니라 청소년이 스스로 만들고 이끄는 새로운 형태의 기념의식이기도 합니다. 국제 청소년 주도의 기념의식은 단지 어른들이 만든 기념식에 초대된 ‘참석자’가 아니라, 청소년이 직접 의제를 정하고, 날짜와 상징을 선택하며, 의례의 형식을 창안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이 글에서는 ①기존 국가·학교 기념식과 청소년 주도 기념의식의 차이, ②국제적으로 확산된 청소년 기념의식의 유형, ③이러한 의례가 교육·정치·문화에 미치는 영향, ④위험과 과제, ⑤앞으로의 가능성을 살펴봅니다.
1. 어른이 만든 기념식 vs 청소년이 주도하는 기념의식
전통적으로 기념식은 국가·학교·종교·지역 공동체가 기획하고, 청소년은 그 안에서 합창단, 기념 공연, 대표 학생의 헌시 낭독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청소년은 이미 짜여진 각본 안에 들어가는 ‘배우’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국제 청소년 주도 기념의식은 구조가 완전히 다릅니다.
1) 의제 설정의 주체 변화
기후위기, 학교폭력, 성평등, 인종차별, 디지털 권리 등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할지 자체를 청소년이 결정합니다. 어른들은 후원자·동맹으로 참여할 수는 있어도, 방향을 정하는 주도권은 청소년에게 있습니다.
2) 형식의 변화
기존 기념식은 국민의례, 공식 연설, 헌화, 공연 등 비교적 정형화된 틀이 많습니다. 반면 청소년 주도 기념의식에서는 침묵 시위, 플래시몹, 손팻말과 피켓 전시, 온라인 해시태그 캠페인, 추모 포스트잇과 사진 설치 같은 유연하고 실험적인 형식이 많이 나타납니다.
3) 감정의 결을 달리하는 기념
전통적 기념식이 ‘국가’와 ‘제도’의 목소리를 앞세웠다면, 청소년 주도 기념의식은 분노, 슬픔, 두려움, 희망, 유머가 뒤섞인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처럼 국제 청소년 주도의 기념의식은 “기억하라고 배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당장 기억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스스로 의례로 만드는 시도입니다.
2. 국제 청소년 운동 속 기념의식의 다양한 모습
국제적으로 확산된 청소년 주도 기념의식은 여러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1) 기후위기와 환경 기념의식
특정 요일을 정해 등교 대신 거리에서 집회를 여는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매년 같은 날짜에 전 세계 도시가 동시에 시위를 여는 방식은 일종의 “행동하는 기념일”입니다. 이 날은 단순 시위를 넘어 기후 피해 지역과 미래 세대를 위한 추모와 약속의 날로 기능합니다.
2) 폭력·재난 피해자를 위한 추모 의례
학교총격, 집단 따돌림, 성폭력 사건이 일어난 뒤, 청소년들은 교정과 거리, 온라인에 편지, 포스트잇, 꽃, 리본, 그림을 놓으며 자신만의 추모 공간을 만듭니다. 매년 사건 발생일이 되면 침묵 행진, 교실에서의 추모 시간, 피해자를 기억하는 문화제 등이 열리며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의례화됩니다.
3) 인권·평등을 위한 국제 연대 기념의식
인종차별 반대, 성소수자 인권, 여성혐오 반대 등 국제 인권 기념일에 맞춰 청소년이 주도하는 행진·퍼포먼스·온라인 캠페인이 동시에 여러 나라에서 펼쳐집니다. 이때 청소년들은 특정 색깔의 옷을 입거나, 상징 문구를 적은 피켓을 들고, 함께 구호를 외우는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세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기념 언어를 만들어 갑니다.
4) 디지털 공간에서의 기념의식
SNS 프로필 사진을 바꾸거나, 특정 해시태그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온라인 추모 공간에 댓글과 이미지를 남기는 행위는 청소년에게 아주 익숙한 기념 방식입니다. 이 디지털 의례는 국경을 넘는 속도가 빠르고, 익명성과 안전성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국제 청소년 기념문화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습니다.
3. 국제 청소년 주도 기념의식이 가진 교육적·정치적 의미
이러한 기념의식은 청소년에게 단순한 ‘행사 참여’를 넘어, 여러 층위의 학습과 변화를 가져옵니다.
1) 시민성 교육의 장
청소년들은 문제를 정의하고,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참가자를 모으고, 메시지와 상징을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기획·조직·토론·협상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이는 교과서만으로는 배우기 어려운 실질적인 시민 역량을 길러 줍니다.
2) 목소리를 내는 연습과 자존감
자신의 경험과 분노, 슬픔, 희망을 말과 몸으로 표현해 보는 기념의식은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을 줄이고, “함께라면 조금은 바꿀 수 있다”는 감각을 키워 줍니다.
3) 세대 간 대화의 시작점
청소년 주도의 기념의식은 어른들에게도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 세대가 이런 위험과 미래를 떠안아야 하나요?”, “어른들이 만든 규칙과 문화는 공정한가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함께 바꿀지 논의하는 과정이 세대 간 대화를 여는 출발점이 됩니다.
4) 국제 연대의 경험
동일한 날에 다른 나라 청소년이 비슷한 이슈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청소년들은 자신이 ‘한 나라의 학생’이 아니라 ‘지구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체감하게 됩니다.
4. 청소년 주도 기념의식의 위험과 과제
그러나 국제 청소년 주도의 기념의식이 항상 긍정적인 효과만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1) 형식화·피로감
매년 비슷한 방식의 집회와 캠페인이 반복되면 당사자와 참여자 모두에게 피로감이 쌓이고, 메시지의 힘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기념의식 이후 실제 정책 변화나 학교 문화 개선이 뒤따르지 않으면 “행사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냉소도 생깁니다.
2) 대표성의 문제
기념의식을 조직하는 청소년 그룹이 특정 계층, 학교, 지역, 성별에 편중되어 있다면, “청소년 전체의 목소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부만 대표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주배경 청소년, 장애 청소년, 비진학 청소년 등 다양한 집단의 목소리를 어떻게 포함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3) 안전과 돌봄
거리에 나와 행동하고, 어른 권력에 맞서는 기념의식은 때로 경찰력, 학교·가정의 압력, 온라인 공격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특히 폭력·재난 피해를 기념하는 의례에서는 당사자와 친구들의 상처가 다시 자극될 수 있어 정서적 안전망과 전문적인 지원이 함께 설계되어야 합니다.
4) 상징과 실제 변화의 연결
청소년 주도 기념의식이 사회적 상징과 미디어 이미지에만 머무르지 않고, 학교 규칙 개정, 지방자치 조례, 국가 정책 논의 등 실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어른 세대와 제도권의 책임 있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5. 결론: 청소년이 만든 기념의식은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가
국제 청소년 주도의 기념의식은 기존의 국가·학교 중심 기념문화를 흔들며, “누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을 청소년 스스로에게 가져오는 흐름입니다.
이 의례들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 우리는 청소년을 여전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만 보는가, 아니면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가는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는가?
- 청소년이 만든 기념의식에서 드러난 분노와 슬픔, 요구를 어른 사회는 얼마나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 기념의식 이후 학교, 지역사회, 국가 정책은 실제로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
국제 청소년 주도의 기념의식이 일시적인 유행이나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세대 간 신뢰를 쌓고, 더 안전하고 공정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 위해서는, 청소년의 목소리를 “감정적인 항의”가 아니라 “함께 미래를 설계하자는 제안”으로 받아들이는 어른 사회의 태도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럴 때, 청소년이 만든 기념의식은 단지 오늘의 분노를 표현하는 자리를 넘어서,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고, 현재의 불의를 드러내며,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하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학교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