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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제정하고 운영하는 기념일은 단순히 “기억해야 할 날”을 표시하는 달력의 장치가 아닙니다. 국가 권력이 어떤 역사와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잊히게 두려 하는지 보여 주는 상징적인 무대이기도 합니다. 독립기념일, 전승기념일, 헌법 기념일, 순국선열 추모일, 국가 원수 탄생일 등은 각기 다른 이름을 달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국가가 자신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드러내는 도구로 기능합니다. 이 글에서는 ①기념일 제정 자체가 가진 정치성, ②명칭·날짜·의례가 담고 있는 국가권력의 상징, ③기념식 연출과 미디어를 통한 메시지 통제, ④시민과 사회운동이 기념일을 재해석하는 과정, ⑤기념일을 둘러싼 갈등이 말해 주는 국가권력의 한계를 살펴봅니다.
1. 달력은 국가가 짜는 ‘기억의 지도’
국가가 공휴일과 기념일을 법으로 정하는 행위는 어떤 사건을 ‘공식 기억’으로 올리고, 어떤 사건은 사적·비공식 기억으로 남겨 두겠다는 선택입니다.
달력에 적힌 기념일은 “이 날은 모두가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국가의 공식 요청이자 명령입니다. 반대로, 달력에 없는 사건은 기억하더라도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수준에 머물기 쉽습니다.
따라서 기념일 제정은 곧 다음을 의미합니다.
- 공식 역사 서사의 선정 – 독립, 혁명, 전승, 헌법 제정, 민주화 등 국가가 자신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기둥’을 세우는 작업입니다. 무엇을 건국·해방·혁명으로 부를지, 또 어떤 사건을 “국가적 치욕” 혹은 “과거의 잘못”으로 인정할지도 기념일의 제정·부재와 연결됩니다.
- 집단 정체성의 틀 만들기 – “우리는 어떤 민족·국민인가?”라는 질문에 기념일은 하나의 답을 제공합니다. 해방과 독립을 강하게 강조하는 나라, 헌법과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나라, 군사적 승리와 영웅을 부각하는 나라마다 달력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달력은 단지 날짜를 분류하는 도구가 아니라, 국민이 1년 동안 무엇을 반복해서 기억하도록 “설계”하는 국가권력의 상징적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름과 날짜, 상징 언어 속의 권력
같은 사건을 기념하더라도, 어떤 이름과 날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가가 내세우는 메시지는 크게 달라집니다.
첫째, 어떤 단어를 쓰는가: 독립·해방·혁명·전승
‘독립기념일’이라고 부를 때 초점은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난 주권 회복에 맞춰집니다. ‘해방’이라는 단어는 억압에서 풀려난 감정과 새로운 시작의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혁명 기념일’이라고 부르면 기존 체제를 뒤집은 주체(민중·당·군 등)를 정통성의 중심에 세우는 효과가 납니다. ‘전승기념일’은 군사적 승리와 영웅, 무력을 전면에 내세우며 국가의 군사력을 정당화하는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 어느 날을 기준으로 삼는가
어떤 나라에서는 실제 독립 선언일이 아니라 새 정부가 수립된 날, 헌법이 공포된 날, 혹은 특정 지도자가 권력을 잡은 날을 기념일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 선택은 “진정한 출발점은 어디인가”에 대한 국가권력의 자기 해석을 드러냅니다.
셋째, 누구의 이름을 함께 부르는가
기념일 전체 이름에 특정 지도자나 집단의 이름을 넣는 경우, 그 인물·집단은 국가 정통성의 상징으로 고정됩니다. 반대로, 시대가 변하면서 특정 인물의 이름을 빼거나 이름 자체를 바꾸는 변화는 권력 교체와 역사 인식 재편을 보여 주는 신호입니다.
기념일의 명칭과 날짜 선택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국가권력의 공식 번역이자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기념식 연출: 국가권력의 시각적·감정적 무대
기념일은 단지 ‘하루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의례와 행사를 통해 국가권력이 자신을 몸으로, 눈으로, 귀로 느끼게 만드는 무대입니다.
첫째, 군사 퍼레이드와 의장 행렬
탱크·전투기·병력이 등장하는 퍼레이드는 시민에게 “우리는 강하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주입합니다. 의장대의 절도 있는 동작, 국기 게양, 국가 연주는 규율과 통일성을 강조하며 “하나의 국가 아래 질서 있게 정렬된 국민”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둘째, 연설과 호명되는 이름들
대통령·국왕·총리의 기념사에는 어떤 단어가 반복되는지, 어떤 집단의 희생과 공헌만 호명되고 누구는 빠져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연설문은 기념일의 의미를 현재 정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자리이며, 동시에 국가권력이 국민에게 요구하는 태도를 명시하는 언어입니다.
셋째, 추모 의례와 침묵
헌화·분향·묵념·종소리는 희생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국가가 그 희생을 ‘대표하여 기억해 주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때 국가권력은 “당신들의 죽음을 국가가 잊지 않는다”는 약속을 내세우며 정통성과 도덕적 권위를 강화합니다.
넷째, 축제와 오락의 결합
불꽃놀이, 콘서트, 할인 행사, 대규모 축제는 기념일을 즐거운 집단 경험으로 만들며 국가에 대한 호감과 소속감을 부드럽게 고양합니다. 권위적 의례와 대중적 축제를 섞어 국가권력은 “엄숙한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시민과 함께 즐기는 친구”의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기념식 연출은 국가권력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이게 할지 감각적으로 설계한 상징의 장치입니다.
4. 미디어와 교육: 국가 서사의 반복 재생
기념일의 상징성이 힘을 가지려면 매년 반복되어야 하고, 학교·언론·콘텐츠를 통해 일상적으로 재생되어야 합니다.
첫째, 교과서와 학교 행사
특정 기념일을 중심으로 역사·도덕·사회 교과서 내용이 구성되고, 학교에서 기념식·특별수업이 이루어집니다. 학생들은 왜 이 날이 중요한지, 어떤 인물·사건이 영웅·본보기로 제시되는지를 통해 국가가 원하는 가치와 감정을 학습하게 됩니다.
둘째, 뉴스와 특집 방송
기념일 당일에는 관련 사건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 특집 기사들이 쏟아집니다. 여기서 어떤 이미지가 핵심 장면으로 선택되는지, 피해·가해·저항의 관계가 어떻게 설명되는지가 국가 서사를 뒷받침하기도, 때로는 비판하기도 합니다.
셋째, 문화콘텐츠와 상업 광고
드라마·영화·예능·광고 등은 기념일을 배경으로 애국·희생·가족·화해 이야기를 풀어내며 감정적 동의를 이끌어냅니다. 기업 광고 속 기념일 이미지는 “국가와 기업, 시민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상을 주면서 국가권력의 서사에 상업적 메시지를 접붙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념일은 한 번의 국가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퍼진 상징·이미지·이야기의 네트워크로 확장됩니다.
5. 시민과 사회운동: 국가 기념일을 재해석하는 힘
그러나 기념일 속 상징이 항상 국가권력의 의도대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민과 사회운동은 기념일을 다른 의미로 점유하거나, 비판의 장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첫째, 공식 행사 바깥의 추모와 집회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도 한쪽에서는 국가가 주관하는 공식 기념식이, 다른 한쪽에서는 시민단체·유족이 주관하는 추모제나 시위가 열릴 수 있습니다. 이들은 “국가가 말하지 않는 부분” – 예를 들어, 국가폭력의 피해자, 소수자, 여성, 민간인의 고통을 드러내며 기념일의 의미를 확장·수정하려 합니다.
둘째, 기념일의 새로운 언어 만들기
애초에 군사·승리 중심이었던 기념일을 평화·인권·화해의 날로 재해석하자고 요구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 기념일의 명칭 변경, 공식 행사 구성의 변화(군사 퍼레이드 축소, 시민 참여 확대 등)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셋째, 보이콧과 대안 행사
어떤 집단은 국가 기념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애도할 날’, ‘저항의 날’로 규정해 대안 행사를 열기도 합니다. 이는 기념일을 둘러싼 의미 경쟁이자, 국가권력 상징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처럼 기념일은 국가가 상징을 독점하려는 장이면서도, 동시에 시민이 그 상징을 다시 나누고 바꾸려는 역동적 투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결론: 기념일 속 국가권력, 무엇을 기억하게 하고 무엇을 가리는가
기념일을 통해 본 국가권력의 상징성은 몇 가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누구의 희생과 공헌이 기념일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명되는가?
- 어떤 사건과 집단은 항상 주변부에 머물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는가?
- 국가가 설계한 의례와 서사는 오늘을 사는 시민의 감정과 경험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
- 시민과 사회운동은 이 기념일을 어떻게 바꾸고, 확장하고, 거부하고 있는가?
기념일은 결국 “어떤 역사를 우리 모두의 역사로 만들고 싶은가”를 둘러싼 국가와 시민 사이의 긴 대화이자 갈등의 장입니다.
날짜와 의례, 연설과 퍼레이드, 뉴스와 드라마를 조금만 유심히 보면, 그 안에 숨어 있는 국가권력의 얼굴이 보입니다. 한쪽에는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권력의 서사, 다른 한쪽에는 더 많은 목소리와 기억을 끌어들이려는 시민의 시도가 있습니다.
기념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단지 “행사에 냉소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를 위해 기념하며, 그 기억을 바탕으로 어떤 국가와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를 성찰하는 일입니다.
기념일 속 국가권력의 상징성을 읽어내는 작업은 결국 우리 스스로 “국가 서사의 수동적 청중이 아니라, 기억과 기념을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