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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별 헌법 기념일 비교




헌법은 한 나라의 정치 질서와 시민의 권리를 규정하는 “최고 규범”이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에게는 교과서 속 추상적인 문장에 가깝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래서 여러 국가는 헌법이 제정되거나 발효된 날을 기념일로 정해, 국가의 출발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 왔습니다. 다만 헌법 기념일의 위치와 분위기는 나라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어떤 곳에서는 국경일에 준하는 축제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조용한 의전 행사 혹은 교육 프로그램에 머무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일본, 노르웨이, 미국, 독일을 중심으로 헌법 기념일의 역사적 배경과 기념 방식, 정치·사회적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헌법을 대하는 각국의 시각을 비교해 봅니다.

1. 헌법 기념일은 무엇을 기념하는가

헌법 기념일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헌법이 효력을 갖기 시작한 날을 기억하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의미가 겹쳐집니다.

첫째, 국가 탄생 또는 재탄생의 상징입니다. 헌법 제정은 흔히 식민지에서 독립했거나,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헌법 기념일은 단순한 문서 채택일을 넘어 “이 나라가 지금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날”로 이해되곤 합니다.

둘째, 시민과 국가의 ‘계약’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헌법은 국가 권력의 한계를 정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선언하는 규범입니다. 헌법 기념일 행사의 연설·교육 프로그램에서는 “국가 권력은 헌법을 넘어설 수 없다”는 메시지와 “시민은 권리와 책임을 함께 가진 주체”라는 인식이 반복적으로 강조됩니다.

셋째, 체제에 대한 자부심 혹은 논쟁의 장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헌법이 민주주의·평화·복지국가의 기반으로 인정되며 자부심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헌법 개정 논쟁, 특정 조항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기념일이 곧 정치적 논쟁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즉, 헌법 기념일은 “이 나라가 어떤 원칙 위에 서 있는가, 또 서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 상징적인 날짜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한국: 한때 공휴일이었던 헌법 제정 기념일

한국의 헌법 기념일은 7월 17일입니다.

제헌절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가 헌법을 공포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 헌정 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짜는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친 뒤 독자적인 헌법과 정부를 수립했다는 의미에서 “국가 재건”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국가 공휴일에서 기념일로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7월 17일 제헌절은 오랫동안 공휴일이었으나, 행정·경제적 이유 등을 들어 공휴일 지정에서 제외되면서 현재는 법정 기념일이지만 쉬지 않는 날이 되었습니다. 국회·정부 차원의 기념식과 학술행사, 헌법재판소·법원·법조계의 관련 행사 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대중의 체감도는 예전보다 낮아졌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또한 제헌절을 전후해 헌법 교육·개헌 논의와의 연결이 이루어집니다. 헌법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 모의국회, 헌법 토론회 등이 열리며, 개헌 필요성과 방향을 둘러싼 논의도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정부 형태, 기본권 확대, 지방분권 등을 둘러싼 개헌 논쟁이 반복되면서 제헌절은 “헌법을 바꿀 것인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생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헌법 기념일은 “국가 수립의 기억”과 동시에 “미완의 민주주의와 개혁 과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중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일본: 평화헌법을 둘러싼 논쟁의 ‘헌법기념일’

일본의 헌법 기념일은 5월 3일(헌법기념일, 憲法記念日)로, 골든위크 연휴의 한가운데에 자리합니다.

전후(戰後) 체제의 출발점으로서, 1947년 5월 3일 이른바 ‘평화헌법’이 시행되면서 일본은 전쟁 포기, 군대 보유 금지(9조), 국민 주권, 기본적 인권의 존중 등을 헌법에 명시했습니다. 이 날은 전후 일본이 군국주의와 결별하고 새로운 국가 모델을 선택했다는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공휴일 + 정치적 토론의 날이라는 점도 특징입니다. 헌법기념일은 공휴일이자 연휴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에게는 나들이와 여행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동시에 개헌에 찬성하는 세력과 평화헌법을 지키자는 세력이 각종 집회·세미나·집단행동을 전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신문·방송·토론 프로그램에서도 헌법 9조, 자위대의 위상, 인권·복지 조항 등을 둘러싼 논쟁이 집중적으로 다뤄집니다.

또한 헌법을 둘러싼 세대·이념 갈등이 드러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전후 세대에게 평화헌법은 전쟁 참화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이지만, 일부 정치세력과 유권자에게는 “자국 방위를 위한 제약”으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그만큼 헌법기념일은 “일본이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를 두고 가치관이 충돌하는 장이 됩니다.

일본의 헌법 기념일은 평화주의·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과 헌법 개정·안보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한데 모여 있는 상징적인 날짜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노르웨이: 헌법 기념일이 곧 ‘국가의 날’이 된 사례

노르웨이의 5월 17일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헌법 기념일입니다.

헌법 제정과 민족 정체성을 보면, 1814년 5월 17일 노르웨이는 헌법을 채택하며 독립과 자치의 의지를 선언했습니다. 이후 실제 정치적 상황은 복잡했지만, 5월 17일은 “노르웨이 국민국가의 출발점”이라는 상징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규모 축제형 헌법 기념일인 이 날에는 국가 공식 행사이자 시민이 주인공인 대규모 축제가 열립니다. 특히 아이들이 국기를 들고 행진하는 ‘어린이 퍼레이드’가 유명하며, 전통 의상 착용, 합창, 거리행진, 놀이와 음식 등이 어우러져 매우 밝고 축제적인 분위기를 이룹니다.

노르웨이에서 5월 17일은 단지 정치적 제도를 기념하는 날을 넘어, 복지국가·민주주의·평등·자연과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함께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헌법이 “국가의 얼굴”로서 일상적인 정체성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들과 차별화됩니다.

노르웨이의 사례는 헌법 기념일이 추모나 의전 중심이 아니라 시민 축제이자 정체성의 축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5. 미국과 독일: 조용하지만 교육·성찰 중심의 헌법 기념

미국과 독일의 헌법 관련 기념일은 대규모 축제보다는 교육과 성찰, 의전에 비중을 두는 편입니다.

미국: 헌법의 날(Constitution Day / Citizenship Day)을 보면, 1787년 9월 17일 미국 헌법이 서명된 것을 기념해 9월 17일이 헌법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독립기념일(7월 4일)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는 낮지만, 학교·대학에서 헌법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공공기관에서 시민권·헌법 관련 행사를 여는 등 “교육 중심 기념일”의 성격이 강합니다. 동시에 ‘시민의 날(Citizenship Day)’이라는 이름도 함께 사용되며, 시민권 취득자에게 헌법과 시민 참여의 의미를 강조하는 계기로 활용됩니다.

독일: 기본법(Grundgesetz) 기념일의 경우, 독일은 1949년 5월 23일 ‘기본법’이 발효되면서 서독의 민주적 헌정 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짜를 중심으로 연방의회·정부·헌법기관이 기념식, 토론회, 전시 등을 개최하지만,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대형 축제보다는 비교적 조용한 공식 행사와 학술·교육 프로그램에 가깝습니다.

독일의 기본법은 나치 독재에 대한 반성 위에서 인간의 존엄, 권력 분립, 연방주의를 강조하기 때문에, 기념행사에서도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두 나라 모두 헌법 기념일을 통해 “헌법의 원칙을 다시 공부하고, 현재의 정치·사회 문제를 비춰보는 날”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국가별 헌법 기념일의 공통점과 차이

국가별 사례를 바탕으로, 헌법 기념일이 지닌 공통점과 차이를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공통점: ‘국가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한국·일본·노르웨이·미국·독일 모두 헌법 기념일을 통해 “우리는 어떤 역사적 경험을 거쳐, 어떤 원칙 위에 서 있는가”를 다시 말하려고 합니다. 연설, 교육 프로그램, 미디어 보도, 상징적 의례 등을 통해 자유·평화·민주주의·복지·인권 등 각국이 중시하는 가치를 재확인합니다.

차이 1: 축제형 vs 성찰형 vs 논쟁형입니다. 노르웨이처럼 헌법 기념일이 곧 “국가의 날”이자 시민 축제인 경우, 헌법은 자부심과 일상적 정체성의 중심에 있습니다. 미국·독일처럼 비교적 조용한 행사와 교육 중심일 경우, 헌법은 “다시 공부하고 되새겨야 할 규범”으로 강조됩니다. 일본, 그리고 어느 정도 한국에서도 헌법 개정이나 정치적 갈등과 결부되어 기념일이 곧 논쟁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차이 2: 공휴일 여부와 시민 참여도도 중요합니다. 공휴일이면서 대규모 시민 행사와 결합된 곳과, 공휴일이지만 참여도가 낮거나 아예 공휴일이 아닌 곳 사이에는 헌법에 대한 체감도와 친밀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차이 3: ‘어떤 헌법’을 기념하는가라는 관점도 필요합니다. 전쟁 포기 조항을 포함한 평화헌법(일본), 나치 과거를 반성하는 기본법(독일), 복지국가와 평등을 강조하는 노르웨이의 헌정 전통 등 각국이 헌법에서 특히 강조하는 조항과 서사는 다릅니다. 헌법 기념일은 이 차이를 연설과 상징, 예술·문화행사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이 됩니다.

결론: 헌법 기념일은 ‘헌법이 살아 있는지’ 묻는 날

국가별 헌법 기념일을 비교해 보면, 이 날이 단순히 “문서를 만든 날을 축하하는 행사”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어떤 곳에서는 독립과 민주주의, 평화와 복지에 대한 자부심을 화려한 축제로 표현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비극적 과거를 다시 떠올리며 “권력은 언제든 헌법을 배반할 수 있다”는 경고를 공유합니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헌법 개정 논쟁, 권리 확대 요구,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헌법 기념일을 계기로 한꺼번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헌법 기념일은 헌법을 단지 ‘존경해야 할 문서’로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시민이 자신의 권리와 책임을 다시 확인하는 살아 있는 약속의 날이 되고 있는가?”

헌법 기념일이 과거의 서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불평등과 차별,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춰보고, 미래 세대가 원하는 새로운 원칙을 논의하는 장이 될 때, 각국의 헌법은 달력 속 기념일을 넘어 ‘지금 여기’의 정치와 삶을 움직이는 실제 규범으로 살아 숨 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