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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갈등이 만든 새로운 기념일




기념일이라고 하면 보통 국경일, 종교 축일, 계절 명절처럼 오래된 전통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기념일이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수십 년 사이에는 전쟁, 독재, 참사, 차별, 혐오, 노동·젠더·환경 갈등 등 사회갈등이 만들어 낸 기념일이 세계 곳곳에서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어떤 날은 국가가 공식 제정하지만, 많은 날들은 시민·유족·사회운동이 먼저 “이 날을 잊지 말자”며 비공식적으로 기념하다가, 시간이 지나 공식화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①사회갈등이 왜 기념일을 낳는지, ②피해자·유족 중심 추모일, ③사회운동·연대형 기념일, ④갈등과 논쟁을 품은 ‘기억전쟁의 날들’, ⑤디지털 시대 시민이 스스로 만든 기념일이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1. 사회갈등은 왜 새로운 기념일을 만들어 내는가

사회갈등은 단순히 “의견이 다른 상태”가 아니라, 누군가에겐 삶을 뒤흔든 폭력과 상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체제·제도의 붕괴와 변화, 사회 전체에게는 기존 질서가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신호가 됩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 욕구를 갖게 됩니다.

첫째, 잊지 않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참사·학살·차별을 경험한 개인과 공동체는 “이 일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잊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사건 ○주기”, “○○ 희생자 추모의 날”처럼 반복해서 부르게 됩니다. 이 반복은 결국 기념일의 씨앗이 됩니다.

둘째, 책임과 약속을 묻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은 말로만 존재하면 쉽게 사라집니다. 날짜를 정해 매년 추모식·행사·토론·보고를 반복하면 진상 규명, 제도 개선, 재발 방지 대책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즉, 기념일은 책임을 기억하게 하는 달력 위의 장치입니다.

셋째, 새로운 정체성과 연대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갈등은 기존의 경계를 깨고 새로운 피해자 집단, 새로운 운동 세대, 새로운 시민 연대를 등장시킵니다. 이들은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만의 상징과 구호, 그리고 ‘우리의 날’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회갈등이 심한 시대일수록 “더 많은 사건이 문제시되고, 그만큼 더 많은 기억의 날이 생겨나는” 역설적인 풍경이 전 세계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2. 피해자·유족이 먼저 세운 날: 추모와 진상규명의 기념일

가장 눈에 잘 보이는 새로운 기념일은 대형 참사·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이 만든 날입니다.

“그날을 잊지 말자”는 달력 만들기를 보면, 대형 사고·국가 폭력·테러·인종 혐오 범죄 등은 수백·수천 명의 피해자를 남기고도 시간이 지나면 뉴스에서 사라지기 쉽습니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사건 발생일, 희생자 발견일, 판결 선고일 등 자신의 삶이 갈라져 버린 그 날짜를 기준으로 매년 추모식·행진·문화제를 이어가며 “달력상에서 지워지지 않는 날”로 만들어 갑니다.

추모 + 진상규명 + 책임요구가 한꺼번에 걸린 날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런 기념일은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는 장면에 그치지 않습니다. 진상 규명, 기록 보존, 책임자 처벌, 제도 개선 요구가 늘 함께 등장합니다. 그래서 추모식의 연설과 현수막에는 “기억하자”와 함께 “진실을 밝혀라”, “책임을 져라”, “다시는 반복하지 말라”는 문장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식·비공식을 넘나드는 과정도 눈에 띕니다. 처음에는 경찰·지자체의 허가를 얻기도 힘들고, 국가 의전 체계 안에도 포함되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정부 차원의 기념식, 국회·정부의 공식 추모행사, 추모비·기념관 조성 등으로 점차 공식 기념일에 가까워지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피해자와 유족이 만든 날은 “정식 국경일이 아니어도, 우리에게는 이 날이 진짜 중요한 날”이라는 사회 내부의 또 다른 달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3. 사회운동이 세운 날: 연대와 저항의 기념일

사회갈등이 만든 기념일 중 상당수는 노동·젠더·환경·인권·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만들어 낸 날입니다.

투쟁의 순간을 기념일로 삼는 경우를 보면, 노동 운동에서는 파업·시위·열사 추모일, 대형 산업재해·노동탄압 사건의 발생일을 매년 기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젠더·페미니즘 운동, 성소수자 인권 운동, 인종차별 반대 운동 역시 특정 사건·시위·법 개정일을 “우리가 같이 싸웠던 날”로 기억하며 행진·문화제·토론회를 개최합니다.

국제기념일과 결합한 ‘세계 ○○의 날’도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국제기념일, 예를 들어 여성, 인권, 노동, 환경, 장애, 인종차별 철폐 등과 관련된 날에 각국의 사회운동이 자국의 현실을 반영한 집회·캠페인을 결합하면서 “글로벌 + 로컬”이 엮인 연대형 기념일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기념과 축제, 저항이 섞인 거리의 광장이라는 점도 특징입니다. 이런 날에는 피켓과 구호, 연설이 있는 한편, 음악 공연, 퍼포먼스, 퍼레이드, 마켓, 전시도 함께 열립니다. 참가자들에게 이 날은 “무겁고 슬픈 날”이자 “서로를 만나고 힘을 얻는 축제”이기도 합니다.

사회운동이 만든 기념일은 결국 “우리는 어떤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며, 어떤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인가”를 매년 확인하는 날입니다.

4. ‘기억전쟁’의 장이 된 기념일: 갈등과 논쟁의 날짜들

사회갈등이 만든 기념일은 항상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기념하는 날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해석이 충돌하는 ‘기억전쟁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영웅의 날” vs “피해자의 날”이라는 대비가 대표적입니다. 어떤 집단에게는 특정 인물·단체·사건이 “영웅”과 “승리”의 상징이지만, 다른 집단에게는 폭력, 억압, 배제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한쪽은 기념식을, 다른 쪽은 맞불집회·항의행동을 조직하며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정반대의 기념 행위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기념일의 무게도 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떤 기념일은 격상되고, 어떤 날은 축소·삭제되거나, 새로운 기념일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이는 곧 “어떤 역사 서사를 공식 기억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선택을 보여 줍니다.

교과서·언론·문화 속에서 이어지는 기억의 싸움도 중요합니다. 기념일을 어떻게 소개하느냐, 어떤 단어로 부르느냐(‘사건’ vs ‘항쟁’ vs ‘폭동’ 등), 어떤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 주느냐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집니다. 결국 기념일은 거리의 행사뿐 아니라 교과서·드라마·영화·다큐멘터리·소설·SNS 속에서도 계속해서 해석과 재해석의 싸움을 낳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회갈등이 만든 기념일은 “갈등을 봉합한 결과”라기보다, “갈등을 둘러싼 기억과 의미가 계속 협상되는 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디지털 시대 시민이 직접 만든 ‘비공식 기념일’들

최근에는 온라인 공간에서 먼저 만들어지는 새로운 기념일도 크게 늘고 있습니다.

해시태그에서 시작하는 날들을 보면, 특정 사건이 벌어진 날 SNS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오늘을 #○○의날 로 기억하자”는 해시태그를 쓰기 시작하면, 공식 선언 없이도 그날의 타임라인은 하나의 거대한 추모·분노·연대의 벽이 됩니다. 이런 움직임이 몇 년간 반복되면 언론·정치권·단체가 이를 “사실상의 기념일”로 인정하고 오프라인 행사·성명·캠페인을 결합하는 흐름도 나타납니다.

온라인 추모관과 디지털 제사도 중요한 양상입니다. 대형 참사·살해 사건·증오범죄 등 이후 온라인 추모 페이지, 추모계정, 웹 기반 추모관이 만들어지며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글·사진·영상이 쌓입니다. 실제 공간의 기념비가 없더라도 디지털 공간의 축적된 기록이 하나의 “보이지 않는 기념비”가 되는 셈입니다.

밈·콘텐츠와 결합된 ‘가벼운 날들’ 역시 디지털 시대의 특징입니다. 사회갈등이 직접 배경에 있지는 않지만, 소비문화·연애·관계·청년 문제를 둘러싼 불만과 농담이 결합해 “○○데이” 같은 새로운 날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가벼운 소비 이벤트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청년 세대의 불안·고독·경제적 압박·관계의 피로가 농담과 짤방의 형태로 녹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디지털 시민이 만든 비공식 기념일은 “법에 없는 날이지만, 많은 사람에게는 분명한 의미를 가진 날”로 존재하며, 앞으로 공식 기념일 체계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큽니다.

결론: 사회갈등이 만든 기념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의 표식

사회갈등이 만든 새로운 기념일을 정리해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첫째, 이 날들은 대개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갈등, 진실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사건, 책임이 온전히 인정되지 않은 상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그래서 이 기념일에는 항상 추모와 애도, 분노와 요구, 연대와 다짐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셋째, 시간과 함께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날이 되거나, 지역·세대·운동 내부에서 더 깊이 뿌리내리는 날이 되거나, 반대로 잊히거나 상업화되는 날이 되는 등 다양한 운명을 맞이합니다.

결국 사회갈등이 만든 기념일은 “우리가 어떤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뿐 아니라, “이 갈등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을 매년 던지는 장치입니다.

어떤 날을 기념하고, 어떤 이름을 붙일지에 대한 논쟁은 피로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논쟁 자체가 기억과 책임, 정의와 화해를 둘러싼 사회의 고민을 보여 줍니다.

기념일이 늘어난다는 것은 갈등이 많다는 사실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중요한 과제는, 사회갈등이 만든 기념일들이 단지 슬픔과 분열만 반복하는 날이 아니라, 피해자의 존엄을 인정하고, 책임과 제도를 점검하며, 더 포용적인 공동체를 상상하는 날이 되도록 기억의 방식을 계속 갱신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