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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광장, 전쟁터였던 언덕, 강가의 다리, 대학 캠퍼스 한쪽… 세계 곳곳의 공간에는 다양한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승리와 영웅을 기리는 웅장한 기마상, 전쟁과 학살의 비극을 기억하는 추모비, 독립과 해방을 상징하는 탑, 이름 없는 이들을 위한 작은 동상까지. 이 조형물들은 단순한 돌덩이나 금속이 아니라, 한 사회가 “어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겠다”고 선택한 역사 해석의 결과물입니다. 이 글에서는 기념 조형물을 통해 세계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고, 미화되고, 때로는 다시 질문받아 왔는지, 몇 가지 관점을 통해 살펴봅니다.
1. 돌과 금속으로 지은 ‘기억의 문장’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기념 조형물은 그중에서도 가장 물질적인 형태의 기억입니다. 연설문과 교과서가 언어로 역사를 말한다면, 기념 조형물은 형태와 크기, 재료와 위치로 역사를 보여 줍니다.
높이 치솟은 탑, 넓은 광장을 장악한 동상, 계단을 오르며 마주치는 부조(浮彫)는 모두 “이 사건과 인물을 크게 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비석, 바닥과 같은 높이에 놓인 표지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조형물은 “조용히, 그러나 오래 기억하자”는 태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즉, 기념 조형물은 무엇을 기억할지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굳어진 결과물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영웅과 승리가 강조되고, 다른 시기에는 피해와 슬픔, 사과가 전면에 나오기도 합니다. 이 변화 자체가 곧 세계 역사 인식의 흐름을 반영합니다.
2. 제국과 승리의 조형물: 힘으로 역사를 새기다
19세기까지 많은 기념 조형물은 제국과 군주의 영광을 기록하는 도구였습니다.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의 기마상, 제국의 수도 중심에 세운 개선문과 승전 기념비, 왕과 황제의 위엄을 과장한 초상 조각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기념물의 공통점은, 첫째 크기와 높이 – 멀리서도 보이도록 크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진다는 점, 둘째 단호한 자세 – 칼과 방패, 깃발, 왕권의 상징물을 쥔 채 흔들림 없는 자세로 표현된다는 점, 셋째 일방적 서사 – 승리와 영광의 서사만을 보여 주고, 그 이면의 식민지 지배·학살·착취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조형물들은 힘이 곧 역사라는 세계관에 기반합니다. “이 도시의 중심을 차지하는 사람이 곧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메시지를 물리적으로 새기는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의 폭력성이 조명되자, 이런 조형물은 점점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그대로 두되 설명판과 교육을 통해 재해석하고, 어떤 곳에서는 이전·철거·재배치를 통해 “더 이상 이 상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합니다.
3. 비극과 상처의 추모비: 침묵 속에서 말하는 역사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식민지 폭력, 민간인 학살, 대량 난민 발생 등 대규모 비극이 이어지면서, 기념 조형물의 성격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승리와 영웅보다, 상처와 희생을 기억하려는 추모비가 전면에 등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추모 조형물의 특징은, 웅장한 영웅상의 대신 비어 있음·균열·단절을 표현하는 형태, 화려한 장식 대신 차가운 돌·콘크리트·금속이나 최소한의 요소를 사용한다는 점, “누가 옳았는가”보다 “누가 희생되었는가”를 묻는 시선입니다.
이 비극의 기념물에서는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진 벽, 텅 빈 광장과 계단, 끝없이 이어지는 비석의 반복 같은 장치가 사용되며, 방문자는 자연스럽게 말을 아끼고, 서서 바라보고, 천천히 걷게 됩니다.
이렇게 조형물은 “우리가 무엇을 자랑스러워하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가”를 묻는 장치로 변해 갑니다. 세계 역사에서 과거의 가해와 피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인식 변화가 조형물의 형식에 그대로 드러난 셈입니다.
4. 독립·해방·인권의 상징물: 새로운 주체의 등장
20세기 중반 이후 탈식민화와 민권·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면서, 기념 조형물의 주인공도 변화합니다. 왕과 군주, 식민 지배자의 동상을 대신해 독립운동가와 해방 영웅, 민권 운동 지도자, 시민·노동자·학생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기념물의 공통점은, 첫째 ‘위대한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의 얼굴’을 보여 주려는 시도 – 여러 사람이 함께 서 있거나, 행진·손잡기·연대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저항과 희망을 동시에 담는 포즈 – 하늘을 향해 들린 손,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 서로를 감싸는 팔은 “끝난 역사”가 아니라 “이어지는 운동”을 상징합니다. 셋째 공간과의 관계 – 광장·거리·대학·공장터 등 실제 운동이 벌어졌던 장소에 세워져, 공간 자체를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로 만듭니다.
이러한 조형물은 더 이상 “통치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가 아니라, “저항하고 견뎌 온 사람들,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람들의 역사”를 드러냅니다. 세계사에서 목소리가 작았던 이들이 비로소 돌과 금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흐름입니다.
5. 철거와 재배치: ‘누구의 기념물인가’를 둘러싼 싸움
21세기에 들어 많은 나라에서 기념 조형물을 둘러싼 논쟁과 철거·이전 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인종차별과 노예제, 식민 지배와 깊이 연관된 인물의 동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독재자와 군부, 쿠데타 세력, 민간인 학살 책임자의 조형물을 공공장소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논쟁은 단순히 “미술 작품을 없앨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 도시에, 이 국가의 공식 기억 속에, 이 사람을 여전히 중심에 둘 것인가?”라는 질문과 직결됩니다.
대응 방식도 다양합니다. 그대로 두되 비판적 설명문과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방식, 박물관이나 별도 공간으로 옮겨 “비판적 전시물”로 재맥락화하는 방식, 시민 청원과 토론을 거쳐 완전히 철거하고 그 자리에 다른 기념물을 세우는 방식 등이 있습니다.
이 과정은 곧 역사를 둘러싼 현재의 싸움입니다. 기념 조형물은 과거의 산물이지만, “지금 누가 이 공간을 어떻게 쓰고 싶은지”에 따라 의미가 바뀌고, 존폐가 결정됩니다.
6. 참여형·일시적 기념 조형물: 기억 방식의 새로운 실험
최근에는 영구적인 돌·청동 조형물 대신, 참여와 체험을 중심에 둔 기념 장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워졌다가 일정 기간 후 해체되는 임시 조형물, 관람자가 직접 글을 쓰거나 물건을 놓고 가는 참여형 공간, 이름 없는 이들을 기리는 작은 표식과 바닥 타일, 시(詩)와 문구를 새긴 벤치와 계단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몇 가지 메시지를 전합니다. 첫째, “기억은 단단히 굳은 돌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겨지고 지워지는 과정이다.” 둘째, “역사 해석의 주인은 몇몇 권력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공간을 사용하는 시민 모두다.”
세계 역사에서 새로운 목소리들―여성, 이주민, 난민, 장애인, 소수자, 이름 없는 노동자―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기념 방식을 찾기 시작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결론: 기념 조형물은 ‘누가 역사의 주인인가’를 묻는 거울
기념 조형물로 세계 역사를 바라보면, 단순한 사건 연표보다도 더 선명한 질문이 드러납니다. 어느 시대에는 왕과 정복자가 중심이었고, 어느 시대에는 국가와 군대가 중심이었으며, 이후에는 피해자와 시민, 저항자와 소수자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기념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 어떤 기념물은 철거되었으며, 어떤 기념물은 새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곧 “우리는 지금, 과거를 어떻게 보고 싶은가?”, “누구의 이야기를 역사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현재의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도시를 걸을 때 마주치는 동상과 탑, 작은 표지석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사회가 선택한 기억과 지우고 싶은 기억이 동시에 보입니다.
결국 기념 조형물은 돌과 금속으로 만든 하나의 답이자, 그 앞에 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거울입니다. 앞으로 어떤 기념물이 사라지고, 어떤 새로운 기념 조형물이 등장할지 지켜보는 일은, 세계 역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길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