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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언서가 확산한 기념의식
과거에는 기념의식이 국가, 종교, 마을 공동체, 가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면, 이제는 팔로워 수가 많은 개인, 즉 인플루언서가 새로운 기념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유튜버의 첫 영상 업로드 기념일, 스트리머의 100만 구독 달성, 인스타그램에서 시작된 챌린지 데이, 해시태그로 확산되는 기부·캠페인 기념일까지, 인플루언서는 하나의 “날짜”와 “행동”을 제안하고, 팬과 팔로워는 그것에 참여하며 새로운 의례를 만들어 갑니다. 이 글에서는 인플루언서가 확산시킨 기념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고, 기존 기념문화와 어떻게 다른지, 그 긍정적 효과와 한계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인플루언서 시대, 누가 ‘기념하자’고 말하는가
예전에는 “이 날을 기념합시다”라는 선언이 대부분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정부, 종교 지도자, 단체, 기업이 공지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참여하는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SNS와 동영상 플랫폼이 주류가 된 이후, 기념의 출발점이 바뀌었습니다. 한 인플루언서가 “오늘은 내가 유튜브를 시작한 지 3년 된 날이에요. 함께 축하해 주세요.”라고 올리면, 팬들은 축하 댓글, 팬아트, 편지, 후원, 해시태그를 통해 그날을 함께 기념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날짜가 원래 공적인 의미를 가진 날이 아니어도, 인플루언서와 팔로워에게는 특별한 ‘기념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즉, 인플루언서는 “날짜에 의미를 부여하는 권한”을 어느 정도 갖게 되었고, 팔로워들은 그 의미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적 기념의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기념이 위에서 내려오는 공지에서,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제안으로 바뀐 셈입니다.
2. 챌린지와 해시태그가 만든 새로운 기념 방식
인플루언서가 확산한 기념의식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형식은 챌린지와 해시태그 캠페인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날을 정해 “오늘은 ○○ 챌린지 하는 날이에요. 이 해시태그를 달고 올려 주세요.”라고 제안하면, 팔로워들은 그 행동을 따라 하고, 같은 해시태그로 사진·영상·글을 올리며 서로의 참여를 확인합니다.
이때 챌린지 내용은 매우 다양합니다. 운동·다이어트·공부 인증 같은 자기관리형 기념 의식, 환경 보호, 기부 인증, 반려동물 입양·후원 같은 사회적 메시지형 기념 의식, 춤 따라 하기, 립싱크, 패션·메이크업 재현 같은 놀이·퍼포먼스형 기념 의식이 대표적입니다.
하루 또는 특정 기간 동안 해시태그가 폭발적으로 사용되면, 그날은 사실상 “○○ 챌린지의 날”로 기능하며, 이후 매년 같은 시기에 비슷한 챌린지가 반복되면 반복 가능한 기념일로 굳어집니다.
전통적인 기념행사가 오프라인에서 모여 진행되었다면, 인플루언서가 만드는 기념의식은 각자 다른 장소에 있지만, 같은 날,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해시태그로 연결되는 분산형 의례라는 점에서 특징적입니다.
3. 팬–인플루언서 관계가 만든 ‘새로운 기념 캘린더’
아이돌·연예인뿐 아니라, 크리에이터·스트리머·전문가 인플루언서에게도 팬덤식 기념일이 생깁니다.
팬들은 스스로 혹은 인플루언서와의 합의 속에서 데뷔일·채널 개설일, 첫 방송·첫 만남·첫 팬미팅 날짜, 구독자/팔로워 10만, 100만, 1,000만 달성일, 인플루언서가 힘든 시기를 극복한 날 등을 기념일로 삼습니다.
기념 방식은 점점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팬아트·영상 편집본 모음 공개, 온라인/오프라인 광고(지하철·버스·전광판 등), 인플루언서 이름으로 진행되는 기부·봉사 프로젝트, 팬들끼리의 이벤트(편지 모음, 팬북 제작, 팬송 제작 등)가 대표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달력이 세분화된다 – 예전엔 연예인의 생일 정도만 기억했다면, 이제는 “채널 개설일, 첫 라이브, 1주년, 3주년…” 등 촘촘한 기념일이 생깁니다. 둘째, 공적/사적 영역이 섞인다 – 한 개인의 커리어와 성장 과정이 전 세계 팬이 함께 기념하는 “공개 기념일”이 됩니다. 셋째, 기념이 곧 후원과 연대 – 기념일에 맞춰 진행되는 기부·모금·캠페인은 팬덤의 에너지를 사회적 행동과 연결시키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인플루언서는 “나의 시간표”를 팬들과 공유하고, 팬들은 그 시간표에 자신들의 감정과 행동을 덧입히면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적 기념 캘린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4. 일상 루틴의 의례화: 인증 문화와 ‘함께 하는 하루’
인플루언서가 만든 기념의식은 꼭 “특별한 날”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팔로워들이 아침 루틴, 월요일/금요일 루틴, 한 달의 시작과 끝을 공유하면서, 일상을 반복하는 작은 의례도 함께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이번 달 1일은 다이어리 세팅하는 날이에요. 같이 셋업해요.”, “매주 월요일 아침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함께 한 주 계획 세워요.”, “오늘은 #노커피데이, 하루만 카페인 없이 버텨봐요.” 같은 제안입니다.
이런 제안은 특정 날짜를 강하게 고정시키기도 하고, “매주 월요일”, “매달 첫째 날”처럼 주기적 기념 루틴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팔로워들은 댓글, 라이브 채팅, 사진 인증을 통해 “나도 이 의식에 참여했다”고 서로에게 보여 줍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혼자 하면 금방 포기할 행동도, 함께 하면 버티게 된다는 심리, 반복되는 루틴이 어느 순간 “우리끼리의 작은 기념 전통”으로 굳어진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인플루언서는 거창한 축제를 열지 않아도, “함께 시작하는 아침 루틴”, “함께 끝내는 한 달 정리” 같은 형태로, 일상을 의례화한 기념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5. 긍정적 영향과 그림자: 연대, 모금, 그리고 피로감과 위험
인플루언서가 확산한 기념의식은 여러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혼자서는 느끼기 어려운 소속감과 연대감을 제공하고, 기부·환경·인권과 관련된 캠페인 기념일은 실제 모금과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창작과 팬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표현 욕구와 관계 욕구를 채우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몇 가지 문제도 드러납니다.
첫째, 피로감과 압박입니다. 챌린지와 기념일이 너무 많아지면, “이번에도 참여해야 하나?”라는 부담이 생기고, 참여하지 않으면 팬덤 내에서 소외될까 불안해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둘째, 보여주기식 참여입니다. 인증 문화가 강해질수록 “정말 그 의미에 공감해서 기념하는지”보다 “사진 잘 찍어서 올리는지”가 더 중요해 보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셋째, 위험한 챌린지와 모방 행동입니다. 일부 과격한 먹방·스턴트·건강에 해로운 행동이 기념 챌린지처럼 퍼질 경우, 실제 부상이나 건강 악화로 이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넷째, 과소비와 상업화입니다. 인플루언서가 브랜드와 협업한 기념일(○○ 브랜드데이, 굿즈 데이 등)은 팬들에게 반복적인 지출을 요구하고, 기념의 본래 의미보다 상품 구매가 중심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인플루언서가 제안하는 기념의식에 참여할 때는 “이 행동이 나와 타인,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나에게 진짜 의미가 있는 참여인가, 단지 따라 하는 것인가?”를 한 번쯤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6. 결론: 인플루언서를 따라가기보다, 의미를 함께 만드는 방향으로
인플루언서가 확산한 기념의식은, 한편으로는 “누구나 기념일을 만들 수 있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더 이상 국가나 종교, 큰 조직만이 기념을 독점하지 않고, 개별 창작자와 팬, 팔로워 공동체가 함께 날을 정하고, 해시태그와 챌린지를 통해 그날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기념일은 내 삶에 정말 도움이 되고, 어떤 기념일은 나를 지치게 하는가?”, “이 기념의식은 누구를 중심에 두고 있으며, 어떤 가치를 확산하려 하는가?”
인플루언서가 제안하는 기념의식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그 의식의 주인이 인플루언서만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위해서는 의미를 비판적으로 살피고, 필요하다면 기념 방식을 스스로 바꾸어 보고, 때로는 “하지 않는 선택”도 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인플루언서가 만든 기념의식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삶과 관계를 돌아보고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살아 있는 기억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