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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관점에서 본 기념의식

인류학 관점에서 본 기념의식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기념일과 기념의식은 인류학자의 눈으로 보면 아주 흥미로운 연구 대상입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국경일 행사, 마을 축제, 졸업식과 입학식, 생일과 장례, 추모식과 집회까지, ‘특별한 날’을 기억하기 위해 반복되는 행위와 상징은 사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누구를 우리로 포함시키며, 어떤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는지 잘 드러내 줍니다. 인류학은 기념의식을 단순한 행사나 겉치레가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를 설명하고 재조직하는 과정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인류학 관점에서 기념의식이 갖는 의미를 시간·기억·공동체·권력·세계화라는 다섯 가지 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우리가 매년 반복하는 기념행사들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인류학에서 보는 ‘기념의식’이란 무엇인가

인류학에서 의례(ritual)는 상징적인 행위가 정해진 시간과 장소, 형식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수행되며, 그 사회가 믿는 가치와 질서를 드러내고 재확인하는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기념의식은 그중에서도 “어떤 시간과 사건을 특별히 구분해 기억하려는 의례”에 해당합니다. 국가의 건국일, 전쟁 승전 혹은 패전, 혁명과 민주화, 재난과 추모, 종교적 축일, 가족의 생일·결혼기념일·제사까지 모두 넓은 의미의 기념의식입니다.

인류학자는 이런 기념의식을 볼 때 보통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1) 무엇을 기억하려 하는가? 2) 누가, 누구를 대신해 기념을 조직하는가? 3) 이 기념을 통해 지금/미래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즉 기념의식은 과거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늘 지금과 미래의 이해관계에 깊이 관련된 ‘현재의 정치적·문화적 행위’로 분석됩니다.

2. 시간과 기억을 조직하는 장치로서의 기념의식

인류학 관점에서 기념의식의 첫 번째 기능은 시간을 나누고, 기억을 배열하는 것입니다.

달력과 연호, 공휴일은 모두 사회가 “이날은 다른 날과 다르다”고 정해놓은 약속입니다. 국경일, 독립기념일, 혁명기념일은 “이 날 이전과 이후의 세계가 달라졌다”는 해석을 매년 다시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추모일과 재난 기념일은 “그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집단적 약속을 상징합니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기념일이 어떤 사건은 ‘역사적 전환점’으로 격상시키고, 어떤 사건은 달력 밖으로 밀어내며, 그 결과 사회의 공식 기억 지도를 어떻게 만드는지 분석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전쟁이라도 어떤 국가는 승리를 기념하고, 다른 국가는 희생자를 추모하며, 또 어떤 국가는 아예 공식적인 기억에서 지우려 합니다. 기념의식은 이렇게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를 둘러싼 힘의 경쟁과 깊게 연결됩니다.

개인의 생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일, 돌잔치, 성년식, 결혼식, 환갑잔치, 장례식은 모두 한 사람의 시간을 구간으로 나누고, “이제 너는 다른 단계로 넘어간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기념의식입니다. 인류학에서는 이를 통과의례(rites of passage)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3. 공동체를 묶는 상징적 퍼포먼스

기념의식은 늘 여럿이 함께 하는 행위입니다. 깃발, 노래, 상징물, 행진, 묵념, 축배, 선물 교환 같은 요소는 모두 “우리”라는 감각을 강화하는 장치입니다. 인류학자들은 이를 ‘상징적 퍼포먼스’로 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가 제창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우리는 한 나라의 구성원”이라는 메시지를 몸으로 수행하게 만듭니다. 마을 축제에서의 줄다리기·행렬·공동 식사는, 평소 갈등이 있던 이웃 사이에도 잠시 “함께 한다”는 경험을 제공하며 긴장을 완화하는 기능을 합니다. 가족의 기념식(생일, 제사, 결혼기념일)은 흩어져 살던 친척들이 다시 모여 서로의 위치와 관계를 재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는 이때 감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쁨, 자부심, 슬픔, 분노를 함께 느끼는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 편”과 “내가 속한 집단”을 감각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기념의식은 사회를 묶는 접착제이자, 동시에 내부·외부를 나누는 경계선이 되기도 합니다.

4. 전환의 순간: 통과의례와 기념의식

인류학에서 유명한 개념인 통과의례는, 1) 이전 상태와의 단절, 2) 애매하고 전환적인 ‘사이의 시간’, 3) 새로운 상태로 편입이라는 세 단계로 설명됩니다.

기념의식은 이 단계들을 드러내는 형식을 취합니다. 졸업식에서는 교복이나 가운을 입었다가 벗고, 졸업장을 받으며 “학생”에서 “졸업생·사회인”으로 상징적으로 이동합니다. 장례식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세계를 구분하면서도, 제사·추모를 통해 두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합니다. 국가 통합이나 정권 교체 후의 기념행사는, “이전 체제와의 단절”과 “새로운 질서의 출범”을 상징화합니다.

인류학자가 볼 때 이런 전환의 기념의식은 세 가지 효과를 냅니다. 첫째, 불안을 줄인다 – 급격한 변화(죽음, 이별, 사회적 지위 변화)를 예측 가능한 의례로 감싸,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둘째, 새 질서를 설득한다 – “이제부터 네 자리는 여기다”라는 메시지를 의례를 통해 내면화하게 합니다. 셋째, 집단적 승인 – 변화가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공인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즉 기념의식은 단지 ‘축하’나 ‘작별’이 아니라, 새로운 규범과 역할을 부여하는 사회적 승인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권력과 저항의 정치학: 누가 무엇을 기념하는가

인류학은 기념의식을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장으로도 분석합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기념식(국경일, 승전기념일, 국가추모식)은 보통 “국가가 공식으로 인정하는 역사 해석”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상징물, 연설, 군사 퍼레이드, 지도자의 등장 방식, 행사장 배치 등은 모두 권력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재현합니다. 기업이나 대형 조직의 창립기념식, 시상식, 연례행사는 조직에 충성하는 인물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시화하며, 내부 위계를 강화합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공식 기념의식 바깥에서 등장하는 ‘대항 기념의식’입니다. 국가가 특정 사건을 영웅담으로 기념할 때, 피해자·소수자·시민단체는 같은 날을 추모와 비판의 날로 기념하기도 합니다. 공식 절차에서 배제된 집단은 별도의 추모제·문화제·거리 행진을 조직해 “우리도 이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기념의식은 한쪽에서는 제도와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는 도구, 다른 한쪽에서는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고 저항을 조직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인류학적 분석은 이 두 얼굴을 동시에 살펴보며, “누구의 기억이 공적 기억이 되는가”를 묻습니다.

6. 세계화와 미디어 시대, 변하는 기념의식

오늘날 기념의식은 더 이상 한 마을·한 국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세계화와 디지털 미디어가 기념의식을 어떻게 재편하는지도 주목합니다.

국제 연합과 각종 국제기구가 지정한 ‘세계 ○○의 날’은, 각국의 현지 문화와 결합해 다양한 형태의 기념행사로 변주됩니다. 같은 날이지만 지역마다 내용과 분위기가 다른 ‘로컬화된 글로벌 기념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SNS와 스트리밍은 한 도시에서 열리는 추모제·퍼레이드·문화제를 전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시청하고, 해시태그와 댓글로 참여하게 만듭니다. 오프라인 의례와 온라인 참여가 결합하면서, 기념의 규모와 속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밈(meme)’과 챌린지를 통해 아주 짧은 기간 유행했다 사라지는 일회성 기념 문화도 생겨납니다. 이 역시 “무엇을 기억할지”를 둘러싼 새로운 경쟁의 형태입니다.

인류학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변화는 기념의식의 주체가 국가·종교·엘리트에서 대중과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 어디까지가 진지한 기념이고 어디부터가 상업·오락인지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결론: 인류학이 기념의식을 통해 묻는 것들

인류학 관점에서 본 기념의식은 단순한 ‘행사 일정’이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반복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어떤 과거를 잊기로 했는가? 누가 기념의 방식을 정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목소리가 배제되는가? 축하와 추모의 자리가, 지금의 삶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우리가 매년 당연하게 참여하는 기념일과 의식들도, 이런 질문을 품고 다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얼굴로 보입니다. 어떤 의식은 서로를 돌보고 위로하는 힘을 주지만, 어떤 의식은 과거의 폭력과 위계를 미화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의식은 기존 질서에 숨은 균열을 드러내며 변화를 요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인류학은 기념의식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날을, 어떤 방식으로 기념하느냐는 곧 그 사회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선언이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갈 새로운 기념의식 역시, 우리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와 관계 맺기의 방식을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기념의식을 조금 더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곧 우리 시대의 기억과 정체성을 스스로 점검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