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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만든 새로운 기념문화
기념문화라고 하면 예전에는 기념일에 가족이 모여 사진을 찍고, 앨범을 만들고, 편지나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인공지능, 메타버스, 바이오·우주 기술까지 등장한 지금,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특정 날짜에만 추억을 꺼내 보던 시대에서, 알고리즘이 “○년 전 오늘”을 자동으로 보여주고,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해시태그로 동시에 참여하는 온라인 기념일, 현실 대신 가상공간에서 열리는 생일파티와 추모식, 심지어 디지털 데이터와 유전자, 우주 공간까지 활용한 기념 방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과학기술이 만들어 낸 새로운 기념문화를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 안에 담긴 가능성과 위험, 앞으로의 과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누구나 기록자가 된 시대: 스마트폰과 SNS가 바꾼 일상 기념
과학기술이 만든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기록의 폭발입니다. 예전에는 중요한 날에만 카메라를 꺼냈다면, 스마트폰 이후에는 일상의 거의 모든 순간을 사진·영상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일, 여행, 졸업 같은 전통적인 기념일뿐 아니라, 오늘 처음 먹어 본 음식, 우연히 본 예쁜 하늘,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기분이 좋은 날까지도 SNS에 올리고, 해시태그를 달고, 친구들과 공유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념할 만큼 특별한 순간”의 기준도 크게 낮아졌습니다. 과거에는 연 1~2번 차분히 정리하던 추억이, 지금은 하루에도 여러 번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소비됩니다.
또한 카메라·위치 정보·시간 정보가 자동으로 저장되면서, 우리는 나중에 사진을 꺼내 볼 때 단순한 장면을 넘어 “언제, 어디서, 누구와” 있었는지를 쉽게 되짚을 수 있습니다. 기술은 이렇게 개인의 일상을 훨씬 꼼꼼하게 기록하게 만들었고,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까지도 “기념의 재료”로 끌어올렸습니다.
2. 해시태그와 챌린지가 만드는 ‘새로운 기념일’
과거의 기념일 대부분은 국가·종교·지역 공동체가 정한 공식적인 날짜였습니다. 하지만 SNS 시대에는 해시태그와 온라인 챌린지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새로운 기념일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특정 요일마다 과거 사진을 올리는 방식, 환경·인권·동물보호 등을 주제로 한 챌린지, 유명인의 생일이나 콘텐츠 공개일을 함께 축하하는 팬덤 문화가 대표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기념일”은 더 이상 달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 유행하는 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매년 같은 해시태그가 반복되며 비공식적인 연례행사로 자리 잡기도 합니다.
브랜드나 공공기관도 이런 흐름에 합류해 “○○의 날”을 만들어 캠페인을 벌이고, 해시태그 참여를 통해 기부·후원·캠페인 성과를 연결하는 등 마케팅과 공익 활동을 결합한 새로운 기념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기술, 특히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기념일을 위에서 ‘선포하는 것’에서, 아래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3. 알고리즘이 되살리는 추억: 자동 생성되는 ‘기념의 순간’
몇 년 전부터 많은 플랫폼이 “○년 전 오늘 당신의 추억”을 자동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도입했습니다. 과거라면 우리가 직접 앨범을 꺼내지 않는 한 묻혀 있었을 사진과 글들이, 이제는 알고리즘을 통해 스스로 기념일처럼 되살아납니다.
SNS에서 과거의 게시물을 모아 영상으로 만들어 주거나, 사진 앱이 특정 사람·장소·기간을 묶어 “하이라이트”로 제안하거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1년간 들었던 곡들을 정리해 “○○의 연말 결산”을 만들어 주는 것 이 모두 기술이 만들어 준 새로운 기념의 형식입니다.
중요한 점은, “어떤 기억이 중요한지”를 더 이상 우리가 직접 고르지 않고, 알고리즘이 선택하고 편집해 보여 준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플랫폼이 골라 준 기억을 중심으로 과거를 떠올리게 되고, 어떤 순간들은 계속 재생되며 점점 더 의미가 커지는 반면, 다른 순간들은 빠르게 잊혀질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기술은 추억을 소환하는 편리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어떤 추억을 남기고 어떤 추억을 잊을 것인가”를 보이지 않게 조정하는 새로운 기억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4. 메타버스와 온라인 게임 속 기념의식: 가상 공간에서 만나는 축하와 추모
과거의 기념 행사는 대체로 오프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메타버스 플랫폼과 온라인 게임, 가상현실 기술이 발달하면서, 현실 공간과는 다른 차원의 기념문화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 속에서 열리는 콘서트와 페스티벌, 메타버스 공간에서 진행되는 졸업식·입학식·결혼식, 팬들이 가상 세계에 만든 기념관과 전시공간, 온라인 추모관과 디지털 분향소, 가상 추모비 등이 그 예입니다.
특히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감염병 유행·정치적 억압 등으로 실제로 모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상공간은 함께 기념하고 애도할 수 있는 대안적 장소가 됩니다. 아바타로 입장해 함께 춤추고, 메시지를 남기고, 디지털 꽃과 촛불을 바치는 행위는, 현실의 장례식장과 추모공간에서 하던 의식을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기념은 반드시 물리적 장소에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념 형식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터넷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계정이 정지될 경우 추억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도 함께 안고 있습니다.
5. 바이오·우주 기술이 확장한 기념의 스케일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념의 범위를 디지털을 넘어 유전자와 우주 공간으로까지 넓혀 가고 있습니다.
바이오 기술과 데이터 저장 기술의 발달로, 유전자 정보를 남겨 후손에게 전하고자 하거나, 자신의 목소리·영상·채팅 기록을 바탕으로 “디지털 아바타”를 만들어 사후에도 대화가 가능한 형태로 남기려는 시도 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념”을 넘어 “존재의 연장”에 가까운 실험이지만, 어쨌든 기술이 만든 새로운 기억·기념 방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소량의 유골을 우주에 쏘아 올리는 서비스나, 위성·우주선에 메시지·사진·음원을 실어 보내는 프로젝트 등이 “우주장” 혹은 “우주 기념캡슐” 같은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이는 “지구를 넘어 우주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과학기술을 통해 구체적인 기념 방식으로 구현된 사례입니다.
이러한 바이오·우주 기반 기념문화는 여전히 일부 사람들의 선택에 머물지만, 죽음과 기억, 인간과 우주의 관계, 개인의 데이터와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촉발하고 있습니다.
6. 기술이 만든 기념문화의 명암과 앞으로의 과제
과학기술이 만든 새로운 기념문화에는 분명 매력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더 많은 순간을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고,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도 함께 기념하고 애도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념일과 의식을 만들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몇 가지 중요한 질문도 함께 떠오릅니다.
첫째, 기억의 과잉과 피로의 문제입니다. 매일 쏟아지는 사진과 영상, 끊임없이 올라오는 기념 포스트와 알림 속에서, 정말 소중한 순간이 무엇인지 오히려 헷갈리기도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과 “그냥 흘려보내도 될 것”을 구분할 여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 망각의 권리와 사생활 문제입니다. 어릴 적에 올린 게시물, 그때는 가볍게 찍어 올린 사진이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재생된다면, 우리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기억을 너무 잘 붙잡고 있는 탓에, 오히려 “잊힐 권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셋째, 기억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기억을 보여주고, 어떤 기념일을 띄우고, 어떤 캠페인을 사람들 눈앞에 먼저 노출할지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거대 플랫폼과 알고리즘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념문화가 개인·공동체의 선택이 아니라, 플랫폼 설계와 상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기술의 편리함을 충분히 활용하되, 무엇을 기록하고, 어떻게 저장하고, 언제 잊을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디지털 시민성을 기르는 것, 상업적·알고리즘적 편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기억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기술 시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과학기술이 만든 새로운 기념문화는, 결국 우리에게 한 가지 큰 질문을 던집니다. “이렇게까지 모든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스마트폰과 SNS, 메타버스와 인공지능, 바이오와 우주 기술은 기념의 대상과 방식, 기억의 범위와 속도, 추모와 축하의 장소와 언어를 끊임없이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기술 자체는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통해 누구의 삶과 목소리가 더 잘 기억되고, 누구의 존재와 이야기가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르고, 우리는 어떤 순간을 여러 번 되새기고, 어떤 순간을 조용히 흘려보내기로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과학기술이 기념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었듯, 이제 우리는 기술에 끌려가기만 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어떤 기념일과 의식을 만들고 남길 것인지”를 스스로 고민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새로운 기념문화는 단순한 데이터 축적을 넘어, 우리 삶과 공동체를 더 깊이 이해하고 돌보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