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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국적·복수정체성 세대의 기념 선택

actone 2026. 1. 7. 20:37

이중국적·복수정체성 세대의 기념 선택

이중국적·복수정체성 세대의 기념 선택

이중국적·복수정체성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둘 이상의 국가, 언어, 문화에 연결된 존재입니다. 여권만 두 개가 아니라, 국경일·명절·추모일·국가 대표 경기 같은 기념의 순간마다 “어디에 더 마음을 둘 것인가”를 반복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이들의 기념 선택은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니라, ①가족 내부의 관계, ②본국·정착국과의 감정, ③차별 경험, ④개인의 삶의 계획과 얽힌 정체성의 정치학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중국적·복수정체성 세대가 국경일·명절·기념의 순간에 내리는 선택을 통해 어떤 정체성 전략을 만들어 가는지, 그 긴장과 가능성을 살펴봅니다.

1. “어느 쪽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의 압력

이중국적·복수정체성 세대는 기념의 순간마다 비슷한 질문을 듣곤 합니다.

  • 스포츠 경기: “이번 월드컵은 어느 나라 응원해?”
  • 국경일: “이 날은 너한테 어떤 날이야?”
  • 선거·추모일: “너는 어느 쪽 편에 더 가까워?”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당신은 결국 어느 쪽 사람인가?”를 묻는 압력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정체성은 1/N로 나눌 수 있는 비율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에 따라 계속 조정되는 유동적인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기념일은 “국적을 한쪽으로 결정하라”는 시험장이 아니라, “내 안의 여러 연결들을 어떻게 배치해 볼 것인가”를 실험하는 장이 됩니다.

2. 가족 안에서의 기념 선택: 타협과 번역

1) 부모 세대의 “원본 기념일”과의 거리
부모 세대에게 본국의 국경일과 명절은 자신의 어린 시절, 군복무·전쟁·이주 결정, 가족사와 직결된 날짜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국기 게양, 애국가 부르기, 전통 제사·차례 같은 의례를 가르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2·3세는 이 날짜들을 ‘본국 역사 교과서’나 ‘가족이 전해주는 이야기’로만 접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왜 여기에 이렇게 큰 감정을 써야 하지?”라며 거리를 느끼기도 합니다.

2) 일정 쪼개기와 ‘반반 참석’ 전략
복수정체성 세대는 자주 “시간 쪼개기” 전략을 사용합니다.

  • 낮에는 부모와 본국식 기념식·명절 의례에 참석하고,
  • 저녁에는 친구들과 정착국식 파티·불꽃놀이에 가거나,
  • 하루는 한쪽 가족, 다음 날은 다른 쪽 가족과 보내는 식입니다.

이 방식은 누구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려는 노력인 동시에, “나는 두 세계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실천하는 하나의 기술입니다.

3) 의례의 ‘재해석’과 축소·변형
부모 세대 의례를 그대로 이어가기보다,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상징만 남기고 방식은 바꾸는 일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복잡한 제사 대신 간단한 식사·건배·추모 한마디로 대체하거나, 국경일을 “가족 역사 이야기 나누는 날”로 재해석하는 것.

이런 재구성은 전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언어, 감정에 맞는 기념 방식”을 다시 짜는 작업입니다.

3. 사회적 시선 속에서의 기념 선택

1) “충성 테스트”로 작동하는 기념 장면
정착국에서는 전쟁 추모일, 국경일 행사, 국가 대표 경기 응원 등이 종종 “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사용됩니다.

이때 외모·이름·배경이 ‘외국계’로 보이는 복수정체성 세대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체성이 불분명한 사람”, 참여하면 “그럼 본국 쪽은 포기한 거냐”는 이중의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차별 경험이 기념 선택에 미치는 영향
정착국에서 인종차별, 이주민 혐오, 제도적 불평등을 경험한 사람들은 정착국의 기념일을 “나를 환영하지 않았던 사회가 스스로를 축하하는 날”로 느끼기도 합니다.

반대로 본국에서 정치적 탄압, 소수자 차별, 난민·탈출의 경험이 있는 경우, 본국 기념일 역시 복잡한 감정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복수정체성 세대의 기념 선택은 단순히 혈통이나 여권이 아니라, “어디에서 내가 존중받았고 어디에서 상처를 받았는가”라는 경험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3) “둘 다/둘 다 아님”이라는 제3의 위치
일부는 어느 한 나라의 국경일에도 강하게 감정 이입하지 않거나, 제도·국가 중심 기념일 대신 인권·평화·환경 관련 국제기념일에 더 무게를 두기도 합니다.

이 선택은 “나는 둘 다이고, 동시에 둘 다가 아니다”라는 복수정체성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4. 복수정체성 세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기념 방식

1) 하이브리드 파티·행사
복수정체성 세대는 기념일을 섞어 새로운 형식을 만들기도 합니다.

  • 두 나라 음식·음악을 섞은 파티,
  • 본국 언어와 정착국 언어를 함께 쓰는 초대장,
  • 양쪽 깃발·색을 활용한 장식 등은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에 대한 실질적인 대답”이 됩니다.

2) SNS·콘텐츠를 통한 ‘나만의 기념일 말하기’
이들은 브이로그, 에세이, 일러스트, 짧은 영상 등을 통해 “나는 이 날을 이렇게 느낀다”는 개인적인 기념 서사를 공유합니다.

이는 부모 세대가 만들어 둔 국가 중심 서사, 학교·미디어가 전달하는 공식 서사와는 다른 복수정체성 세대의 자기 언어를 축적하는 작업입니다.

3) 생애 주기와 함께 변하는 선택
기념 선택은 한 번 정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학·이주·취업, 결혼·출산, 정치적 사건 등을 거치며 조금씩 바뀝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생기면서 “어떤 이야기를 물려줄 것인가”를 고민하며 본국 기념일을 다시 챙기기 시작하거나, 정착국에서 정치적 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나라 추모일·투쟁 기념일에 더 깊이 연결되기도 합니다.

복수정체성 세대의 기념 선택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따라 계속 수정되는 장기 프로젝트인 셈입니다.

결론: 기념 선택은 ‘어디에 속하느냐’보다 ‘어떻게 연결되느냐’의 문제

이중국적·복수정체성 세대의 기념 선택은 “한국인이냐, 외국인이냐”, “본국 편이냐, 정착국 편이냐”를 가르는 잣대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국경일·명절·추모일은 “내가 어떤 관계들을 어떻게 책임지고 이어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날입니다.

어떤 해에는 가족을 위해 본국 기념식에 더 집중할 수도 있고, 다른 해에는 자신의 삶이 자리한 도시·국가의 기념행사에 더 깊이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부가 “그 선택이 옳다/그르다”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여러 정체성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기념 방식을 실험할 수 있도록 여유와 안전한 공간을 보장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복수정체성 세대의 기념 선택은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세계를 잇는 섬세한 다리로 작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