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종교 간 화해를 위한 공동 추모의 날

actone 2025. 12. 25. 20:49

종교 간 화해를 위한 공동 추모의 날

종교 간 화해를 위한 공동 추모의 날

전쟁, 테러, 학살, 혐오 범죄의 배경에는 종종 종교와 연관된 갈등의 언어가 동원됩니다. 특정 종교가 폭력을 직접 조직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종교적·문화적 경계는 쉽게 증오와 배제의 근거가 되곤 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돌아보며,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모여 희생자를 함께 기억하고 화해를 약속하는 ‘종교 간 공동 추모의 날’에 대한 논의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①종교 간 공동 추모의 날이 등장하게 된 배경, ②공동 추모 의례의 구성과 상징, ③화해와 평화 교육 측면에서의 의미, ④종교·정치적 긴장과 한계, ⑤지속 가능한 기념문화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살펴봅니다.

1. 왜 종교 간 공동 추모의 날이 필요한가

인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종교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자선·연대·용서를 강조하며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힘이 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십자군 전쟁, 종교전쟁, 식민 지배, 민족 갈등, 테러와 학살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다종교·다문화 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1) 폭력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기억 정치
“저 종교 때문에 우리 공동체가 희생됐다”는 서사는 피해 의식을 강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배제와 차별의 근거가 됩니다. 각 종교가 자신이 당한 상처만 말하고 상대에게 가한 폭력은 숨길 때, 화해의 가능성은 더욱 멀어집니다.

2) 기억의 단절과 왜곡
어떤 사건은 특정 공동체 안에서만 조용히 기억되고, 다른 공동체에는 “상반된 이야기”로 전달되기도 합니다. 이 간극은 세대가 바뀔수록 더 커져,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3) 종교의 평화 메시지를 현실에서 되살리기 위한 시도
거의 모든 종교는 자비, 사랑, 용서, 평화, 공존을 가르치지만, 실제 신앙 공동체의 실천이 이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종교 간 공동 추모의 날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제안됩니다. “폭력의 희생자를 함께 기억하되, 어느 한 종교의 이름으로 독점하지 않고, 서로의 책임과 상처를 동시에 바라보는 자리를 만들자”는 취지의 상징적 의례인 것입니다.

2. 공동 추모 의례의 구성과 상징

종교 간 공동 추모의 날은 단순히 종교 대표들이 모여 인사하는 행사가 아니라, 각 신앙의 언어와 상징을 조심스럽게 섞어 만드는 공통의 장입니다.

1) 공동 침묵과 묵념의 시간
서로 다른 기도문과 예식을 사용하는 대신, 일정 시간 함께 침묵하고 묵념하는 형식이 자주 택해집니다. 침묵은 어느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어느 교리에도 속하지 않아도 함께 슬퍼하고 사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 언어입니다.

2) 희생자 이름과 사건의 사실을 함께 읽기
특정 종교·민족·국가의 관점에 치우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다양한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사건의 경과와 희생자 목록을 정리해 낭독합니다. 이는 “누가 더 많이 아팠는가”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이 폭력으로 모두가 상처받았고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3) 종교 상징의 ‘나란히 놓임’
십자가, 초, 코란과 성경, 연꽃·만다라, 흰 천과 촛불 등 각 종교의 상징이 한 공간에 나란히 놓이며, 어느 상징도 다른 상징을 지우거나 덮지 않도록 배치와 연출에 각별한 주의가 기울여집니다. 이 장면은 “누가 옳고 그른가”를 겨루는 대신 “다름을 인정한 채 공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화면이 됩니다.

4) 교차 낭독과 공동 발언
한 종교의 지도자가 기도문을 읽을 때 다른 종교인들이 함께 자리하여 경청하고, 이어서 다른 종교의 대표가 자신들의 언어로 애도와 반성을 표현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종교 대표가 함께 서서 공동 선언문을 낭독하는 방식이 자주 사용됩니다.

5) 평등한 자리 배치와 호칭 사용
누구의 자리가 더 높거나 중앙에 치우치지 않도록 좌석·연단·호칭을 최대한 동등하게 설정하는 것도 의례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3. 화해와 평화 교육의 장으로서의 의미

종교 간 공동 추모의 날이 반복될수록, 그날은 특정 사건만이 아니라 화해와 평화 교육의 상징적 캘린더가 됩니다.

1) “우리만의 피해 서사”를 넘어서는 경험
어린 세대에게 “우리 종교는 늘 피해자였다”는 이야기만 들려주면, 다른 집단을 향한 경계와 분노는 쉽게 강화됩니다. 공동 추모식에서 각 종교의 희생과 잘못을 함께 들을 수 있다면 “가해와 피해가 뒤섞인 복잡한 역사”를 조금 더 성숙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타인의 슬픔에 참여하는 연습
신앙이 다르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울고, 침묵하고, 서로의 손을 잡는 경험은 단순한 ‘지식 전달’로는 얻기 어려운 공감을 만들어 냅니다.

3) 종교가 평화의 행위자로 재등장하는 계기
종교가 갈등의 상징으로만 이야기되는 현실에서, 공동 추모의 날은 “종교가 폭력이 아니라 화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 줍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 내부의 자기성찰을 촉진하고, 바깥 사회에도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4) 학습·토론 프로그램과 연계
기념식 전후로 청소년·청년을 위한 강연, 워크숍, 역사 답사, 종교 간 대화 모임이 함께 이루어진다면 추모는 곧 평화교육의 장이 됩니다.

4. 종교·정치적 긴장과 한계

물론 종교 간 공동 추모의 날은 이상적인 취지만으로는 운영되기 어렵고, 여러 현실적인 긴장과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1) 신학·교리적 거부감
어떤 신앙에서는 다른 종교의 예식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교리를 어기는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 추모의 날은 “서로의 기도와 상징을 존중하되, 각자의 신앙 고백을 강요하지 않는 방식”을 계속 조율해야 합니다.

2) 대표성 문제와 내부 다양성
종교별 ‘대표자’가 공동 선언을 한다고 해서 그 종교 구성원 전체의 동의가 확보된 것은 아닙니다. 종파·교단·해석이 다양할수록 누가, 어떤 입장으로 참여하는지가 다른 종파 간 갈등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3) 정치적 이용 가능성
정부·정치세력이 갈등을 봉합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공동 추모 행사를 ‘치적’으로 활용하려 할 때, 피해 당사자나 일부 종교단체는 “진정한 사과와 구조 변화 없이 이미지 정치만 한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4) 형식화·의례 피로감
매년 비슷한 기념식만 반복되고 실제 혐오 발언, 차별, 폭력의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공동 추모의 날은 금세 상징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공동 추모의 날이 기분 좋은 사진과 선언으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무엇이 뒷받침되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듭니다.

5. 지속 가능한 ‘종교 간 화해 기념문화’를 위해 필요한 것

종교 간 화해를 위한 공동 추모의 날이 정말로 의미 있는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중요합니다.

1) 당사자성과 현장의 목소리
폭력과 차별을 직접 겪은 사람들, 유가족, 생존자, 소수 종교·소수 집단의 구성원들이 기념식 기획과 발언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만이 아니라 평신도, 청년, 여성, 이주민, 소수자 신앙인의 이야기가 함께 들려져야 합니다.

2) 사과와 책임, 구조 변화에 대한 분명한 언어
단지 “서로 사랑합시다”가 아니라, 과거에 각 종교·국가·집단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사과와 책임 인식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헤이트 스피치 금지, 종교·문화 차별 금지, 교육·미디어 개선 등 구조 변화를 위한 약속이 뒤따라야 합니다.

3) 연중 활동과 정책 점검으로의 연결
공동 추모의 날에 발표된 선언과 약속이 일 년 내내 이어지는 대화 모임, 연대 행동, 교육 프로그램, 법·정책 개선 논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다음 해 같은 날 “지난 1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함께 점검하는 구조가 마련된다면 기념일은 살아 있는 시간이 됩니다.

4) 갈등을 숨기지 않고 다루는 용기
서로의 교리 차이와 역사적 책임에 대한 견해 차이를 억지로 덮어두기보다, 안전한 대화의 틀 안에서 천천히 드러내고 다루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종교 간 화해를 위한 공동 추모의 날은 과거의 상처를 지우거나 “이제 다 괜찮다”고 말하게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그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시는 같은 폭력이 반복되지 않도록 서로를 붙잡는 약속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