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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혐오범죄 희생자 기념 문화

actone 2025. 12. 22. 07:02

인종차별·혐오범죄 희생자 기념 문화

인종차별·혐오범죄 희생자 기념 문화

인종차별과 혐오범죄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오랜 차별 구조와 편견이 폭발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문화 역시, 한 사람의 죽음만을 애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지게 됩니다. 거리의 촛불, 이름을 호명하는 집회, 벽화와 추모비, 해시태그와 온라인 추모관에 이르기까지, 인종차별·혐오범죄 희생자를 기념하는 방식은 해마다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①인종차별·혐오범죄에 ‘기념 문화’가 필요한 이유, ②국가·도시 차원의 공식 추모, ③당사자·시민이 만드는 거리의 기념 문화, ④디지털 공간의 추모 관행, ⑤기념 문화가 안고 있는 긴장과 한계, ⑥앞으로 필요한 방향을 살펴봅니다.

1. 인종차별·혐오범죄, 왜 ‘기념’이 필요한가

인종차별·혐오범죄는 보통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습니다.

- 피해자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가 아니라,
인종·피부색·국적·종교·성정체성·장애 등
존재 자체 때문에 공격받는다는 점,
- 개인의 편견이나 우발적 분노가 아니라
이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혐오 담론이
특정 순간에 폭력으로 응축된다는 점,
- 피해자와 그 집단 전체에
“너희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

이 때문에 인종차별·혐오범죄 희생자를 기념한다는 것은

1) “이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며,
2) “이 사람의 생명은 충분히 애도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고 사회에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기념 문화는 그래서
슬픔의 표현이자, 구조적 차별에 맞서는 저항의 언어
역할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2. 국가·도시 차원의 공식 추모 문화

일부 국가와 도시는 인종차별·혐오범죄 사건을 계기로 공식 추모일을 지정하거나, 공공 기념공간을 조성하기도 합니다.

1) 공식 추모식과 기념일 제정
특정 학살·폭동·테러 사건을 계기로 국가 추모일, 혹은 도시 기념일을 제정하여 매년 희생자를 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정부·지자체는 공식 추도식, 묵념, 기념 공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인종차별·혐오에 대한 “국가적 유감·반성·의지”를 표현하려 합니다.

2) 기념비·추모관·평화공원
사건이 일어난 장소 근처에 기념비, 추모관,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방식도 흔합니다. 이름을 새긴 벽, 희생자를 상징하는 조형물, 사건을 설명하는 전시 공간은 “언제든 찾아가 기억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합니다.

3) 한계와 논쟁
하지만 공식 추모 문화는 사건의 원인에서 국가·제도의 책임을 얼마나 인정하는지, 피해자·유가족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되는지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때로는 “이미 기념비를 세웠으니 할 일은 다 했다”는 식의 형식적 책임 다하기로 소비되거나, 불편한 진실(경찰의 대응 실패, 정치인의 혐오 조장 발언 등)을 의례 뒤로 밀어내는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3. 거리에서 만들어지는 기념 문화: 촛불, 행진, 벽화

인종차별·혐오범죄 희생자를 기리는 가장 생생한 장면은 대부분 거리에서 시작됩니다.

1) 자발적 추모 공간
사건 현장 주변에는 꽃, 쪽지, 편지, 사진, 촛불, 인형, 리본 등이 자연발생적으로 쌓이곤 합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쓰고, 메시지를 남기고, 잠시 멈춰 서서 묵념하거나 눈물을 흘립니다. 이는 “이 자리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지키는 기억의 장소”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2) 행진과 집회, 이름을 부르는 의례
인종차별·혐오범죄 피해자를 기리는 행진에서는 희생자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군중이 “우리는 잊지 않는다”라고 응답하는 의례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숫자로만 소비된 죽음을 “각각의 삶을 가진 개인”으로 되돌려 놓는 행동입니다.

3) 벽화·거리 예술
건물 벽, 지하철 역, 골목길 담벼락에는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 상징 문구를 담은 벽화가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 벽화는 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공간을 “기억의 장소”로 바꾸고, 차별과 폭력이 계속되고 있음을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상기시킵니다.

거리의 기념 문화는
국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시민과 당사자가 스스로 슬픔과 분노, 연대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내는 과정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디지털 공간의 추모: 해시태그와 온라인 아카이브

오늘날 인종차별·혐오범죄 희생자 기념 문화에서 온라인, 특히 SNS는 빠질 수 없는 공간입니다.

1) 해시태그와 프로필 이미지 바꾸기
특정 사건 이후 희생자의 이름·구호를 해시태그로 달거나, 프로필 이미지를 검은색·상징 이미지로 바꾸는 행동은 “나는 이 사건을 알고 있고, 함께 애도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참여 방식이 됩니다.

2) 디지털 추모관과 아카이브
웹페이지·온라인 지도·아카이브 형태로 희생자의 이름과 사진, 사건 경위, 관련 기사와 증언, 예술 작업을 모으는 시도가 많습니다.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이 접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추모공간은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기억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이 됩니다.

3) 영상·라이브 스트리밍 추모식
추모 집회·행진·토론회·예배·문화제가 실시간 중계되면서 현장에 올 수 없는 사람들도 댓글·공유·기부 등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4) 온라인 공간의 양면성
그러나 디지털 공간은 동시에 2차 가해, 혐오 댓글, 사건을 조롱하거나 왜곡하는 콘텐츠가 급속히 확산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디지털 추모 문화는 플랫폼의 책임, 신고·차단 시스템, 피해자 보호 원칙과 함께 이야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5. 인종차별·혐오범죄 기념 문화가 안고 있는 긴장과 한계

기념 문화가 늘 좋게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여러 긴장과 위험도 함께 존재합니다.

1) 피해자의 얼굴을 소비하는 문제
언론·플랫폼·일부 시민은 희생자의 사진·영상·신상을 반복 노출하며 일종의 “비극의 아이콘”으로 소비하기도 합니다. 이는 유가족과 공동체에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고, 피해자를 “영원한 피해자” 위치에 고정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2) 특정 집단만 앞세우는 선택적 추모
인종·국적·성별·계급에 따라 어떤 희생은 크게 기념되고, 어떤 희생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특히 이주노동자, 난민, 빈곤층, 성소수자, 장애인의 희생은 종종 보이지 않는 죽음으로 남습니다.

3) “기념만 있고, 변화는 없는” 구조
기념식·행진·해시태그 캠페인이 매년 이어지지만, 경찰의 차별적 대응, 혐오 발언을 조장하는 정치, 교육·고용·주거 영역의 구조적 인종차별은 크게 바뀌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 기념 문화는 오히려 “우리는 충분히 애도했다”는 자기 위안으로 기능하며 구조 변화의 긴장을 누그러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4) 국가·기업의 이미지 관리 도구화
국가나 기업이 인종차별에 충분히 대응하지 않으면서 기념일에만 참여해 성명 발표, SNS 이미지 교체, 상징적 후원에 그칠 경우, ‘메모리 워싱(memory washing)’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6. 앞으로의 방향: 피해자 중심, 교차성, 교육과 연결되는 기념 문화

그렇다면 인종차별·혐오범죄 희생자 기념 문화는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할까요?

1) 피해자·당사자 주도성 보장
기념 행사의 형식·내용·메시지는 유가족, 같은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 장기적인 활동을 해 온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결정해야 합니다. 외부 세력(정치인·기업·매체)은 이를 “돕는 위치”에 머무를 필요가 있습니다.

2)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반영한 기념
인종, 젠더, 계급, 이주 여부, 장애, 성정체성 등 여러 요인이 교차할 때 누가 더 취약해지는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기념 문화 속 이야기와 이미지에 다양한 피해자와 공동체가 등장할 때, 우리는 인종차별·혐오가 얼마나 복합적인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교육·제도 변화와의 직접 연결
추모식, 벽화, 해시태그로 끝나지 않고 학교·직장·공공기관에서의 인종차별 교육, 혐오범죄 처벌과 예방을 위한 법·제도 개선, 경찰·사법·언론 시스템의 구조 개혁과 반드시 연결될 필요가 있습니다.

4) ‘기억의 피로’가 아닌 ‘기억의 책임’으로
비극적 사건과 추모 메시지가 너무 자주 등장하면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끼며 “또야?” 하고 스킵해 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기념 문화는 감정의 소비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 제안,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변화(혐오 발언 제지, 차별 목격 시 대응, 연대 단체 후원 등)를 함께 제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