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의 상징 정치학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의 상징 정치학
국제 평화의 날, 핵실험 반대의 날, 반전·군축을 기리는 각종 국제 기념일은 “평화의 가치”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누가 어떤 방식으로 평화를 말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정치의 장이기도 합니다. 한편에서는 전쟁 피해와 희생자를 기억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강조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가 자기 정당성을 강화하거나, 과거 책임을 희석하거나, 특정 분쟁의 현실을 가리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①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이 확산된 배경, ②국가·국제기구가 기념일을 통해 구성하는 ‘공식 평화 서사’, ③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이 기념일을 재전유하는 방식, ④기억에서 배제되는 전쟁과 폭력, ⑤상징 정치 너머 실질적 평화정치로 가기 위한 조건을 살펴보며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의 상징 정치학을 정리합니다.
1. 평화 세계 기념일의 확산과 ‘날짜 정치’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탈식민화 전쟁, 지역 분쟁은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국제적 합의를 낳았습니다. 그 상징적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의 확산입니다.
유엔이 제정한 국제 평화의 날, 핵무기 사용·핵실험을 반대하는 각종 기념일,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반전·평화 기념일, 인권·군축·난민·분쟁 피해 아동을 주제로 한 날들까지, 이러한 날짜들은 달력 위에 “평화를 기억해야 하는 날”을 박아 넣음으로써, 전쟁과 폭력을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역사로 만드는 장치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사건이 세계적 기념일로 격상되고, 어떤 사건은 지역·국가 단위에 머물며, 또 어떤 사건은 아예 기념되지 못하는가를 보면 국제정치의 힘 관계와 이해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즉,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은 단순한 “추모의 시간표”가 아니라 국제 질서가 어떤 전쟁과 희생을 중심에 놓고, 어떤 폭력은 주변으로 밀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상징 정치의 지도이기도 합니다.
2. 국가와 국제기구: ‘평화’를 말하는 방식의 권력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을 주도적으로 제정하고 운영하는 주체는 대부분 국가와 국제기구입니다. 이들은 기념일을 통해 자신들이 어떤 가치를 지지하고 어떤 역사를 기억하는지를 선언합니다.
1) 과거 전쟁 책임의 재구성
어떤 국가는 자신이 가해자였던 전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침묵하거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든 채 “전쟁의 피해자”로서만 자신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평화 기념식에서 민간인 희생, 식민지 지배, 전쟁범죄의 이야기는 약하게 다루고, 자국 병사의 희생과 “국가를 위한 헌신”만 강조된다면, 평화의 날은 과거를 성찰하는 자리가 아니라 국가주의적 기억을 재생산하는 무대가 됩니다.
2) 현재 분쟁에 대한 선택적 침묵
국제기구와 강대국은 특정 분쟁에 대해서는 “평화와 협상”을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자국 혹은 동맹국이 개입한 다른 분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말을 아끼기도 합니다. 국제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일부 분쟁만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다른 지역의 폭력은 통계나 일반론 수준에서만 처리될 때, 어떤 생명은 더 ‘애도받을 가치가 있는 생명’으로 상징 정치적으로 우선순위를 갖게 됩니다.
3) 군사력과 평화의 이중 담론
많은 국가는 평화 관련 기념일에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국방비 증액, 신무기 도입, 동맹 강화 등을 정당화하는 담론을 병행합니다. 이때 평화는 군사력 강화의 결과로 “보장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구조적 폭력(군비 경쟁, 무기 수출, 기지 건설 등)은 평화 담론에서 배제되기 쉽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국제기구는 평화 관련 기념일을 통해 자신이 “평화를 관리하는 주체”임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불편한 전쟁의 역사와 현재를 얼마나, 어떻게 가시화할지를 선택하는 권력을 행사합니다.
3.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기념일을 ‘저항의 무대’로
그러나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이 항상 국가의 상징 정치에만 종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은 이 날짜들을 저항과 비판, 대안 제시의 계기로 적극 활용해 왔습니다.
1) 반전·군축 운동의 집중 행동일
국제 평화의 날, 핵실험 반대의 날 등은 전쟁 반대 집회, 군사 기지 반대 캠페인, 무기 수출·군비 축소 요구를 위한 전 세계 동시 행동의 날로 활용됩니다. 이때 기념일은 국가가 준비한 “조용한 추모식”을 넘어 거리의 시위와 예술 행동, 온라인 캠페인을 통해 살아 있는 정치의 시간표로 전환됩니다.
2) 침묵된 기억을 드러내기
소수민족, 식민지 출신, 여성·아동, 난민·민간인 피해자 등 공식 국가 서사에서 주변화된 이들은 평화 기념일을 계기로 자신들이 겪은 폭력, 기억되지 못한 학살과 인권 침해를 세상에 알리는 활동을 벌입니다. 위안부·성폭력 피해자, 강제동원 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반전운동가의 이야기는 종종 평화 기념일 주변에서 새롭게 조명됩니다.
3) 예술·종교·교육의 장으로서의 기념일
평화 콘서트, 영화제, 전시, 추모 예배·미사, 학교 평화 수업·워크숍 등은 평화를 단지 외교·군사 문제로만 보지 않고, 개인의 삶, 감정, 관계, 상상력의 차원에서 되묻게 합니다. 박제된 국가 의례와 달리, 시민이 주체가 되는 문화·교육 활동은 평화 기념일을 “살아 있는 공론장”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은 국가 권력이 독점하려는 상징 공간을 시민사회가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되찾아 오는 공 contested한 정치적 무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기억에서 배제되는 전쟁과 폭력: ‘보이지 않는 평화의 바깥’
평화 관련 기념일의 상징 정치학을 이해하려면 무엇이 기억되는지뿐 아니라 무엇이 기억되지 못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1) ‘우리 편’의 폭력
자국 군대, 동맹군, 우호 정권이 저지른 폭력과 인권침해는 평화 기념식에서 종종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완곡하게 처리됩니다. 반면 ‘적대국’의 폭력과 잔혹성은 확장·과장되어 서사 중심에 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화의 날이 “폭력 일반”이 아니라 “타자의 폭력”만을 비난하는 장면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2) 구조적·일상적 폭력
군사 분쟁과 폭발, 전투는 평화 담론에서 잘 다뤄지지만, 제재와 봉쇄, 군사 점령, 인종차별, 빈곤과 불평등, 난민·이주민에 대한 폭력 등 구조적 폭력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평화 연구는 “폭탄이 터지지 않아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짓눌리고 있다면 그것 또한 폭력”이라고 지적합니다.
3) 젠더와 평화
전쟁과 평화의 이미지는 종종 남성 병사, 지도자, 협상가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여성·성소수자·아동·장애인·노인이 겪는 성폭력, 돌봄 부담, 생계 파탄, 트라우마 등은 평화 기념일의 공식 서사에서 쉽게 주변으로 밀립니다. 평화 관련 기념일이 젠더·계급·인종·세대의 교차폭력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면, “누구의 평화인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런 배제의 패턴은 평화 기념일 역시 권력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상징 공간이며, 항상 비판적 검토와 재구성이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5. 상징에서 실질로: 평화 기념일을 다시 설계하기 위한 조건
그렇다면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이 단지 상징 정치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평화정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1) ‘내년까지 무엇을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
평화 선언과 추모식으로 끝나지 않고, 군비 감축 목표, 분쟁 해결 프로세스, 난민·전쟁 피해자 지원 계획, 무기 수출·군사훈련의 재검토 등 구체적인 정책 과제와 추진 일정이 함께 제시되어야 합니다. 다음 해 같은 기념일에 “지난 1년간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2) 당사자와 피해자의 참여 보장
전쟁·분쟁 피해자, 난민, 반전운동가, 군인·양심적 병역거부자, 시민사회 단체가 기념식의 청중이 아니라 기획자·발언자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의 날이 “위로받는 날”을 넘어 “정책과 책임을 요구하는 날”이 될 수 있습니다.
3) 교차적 관점의 도입
평화를 군사·외교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인권, 젠더, 환경, 이주, 경제적 정의, 디지털 권리와 연결해 입체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후위기가 새로운 분쟁과 이주를 낳는 문제, 무기 산업과 자원 채굴이 지역공동체에 끼치는 폭력, 온라인 혐오가 실제 폭력으로 이어지는 구조 등은 평화 기념일이 함께 다뤄야 할 새로운 의제입니다.
4) 지역·로컬 차원의 평화 기념일과의 연결
유엔·국가가 정한 “큰날”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과 공동체가 기억하는 학살, 군사기지, 시위, 평화마을·비무장지대·평화공원 등의 로컬 기억을 세계 평화 기념일과 연결하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이렇게 할 때 세계 기념일은 추상적인 ‘세계 평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체감되는 다층적 평화의 시간표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평화 기념일은 무엇을, 누구의 이름으로 기념하는가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의 상징 정치학을 살펴보면, 이 날짜들이 단순한 추모나 축하의 날이 아니라, 어떤 전쟁과 폭력을 중심에 두고, 어떤 희생과 저항을 주변으로 밀어내며, 누가 평화를 말할 권력을 독점하고, 누가 그 서사를 다시 쓰려 하는지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의 장임이 드러납니다.
결국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평화 기념일은 누구의 시선으로 전쟁을 기억하고, 누구의 목소리로 평화를 약속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상징을 넘어 구체적인 변화와 책임의 구조를 설계할 때, 평화 관련 세계 기념일은 국기와 헌화, 묵념으로만 채워진 의례를 넘어, 미래 전쟁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정치적 약속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