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과 사회변화

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과 사회변화
젠더 폭력은 전쟁이나 재난 상황에서만 벌어지는 비상사태가 아니라, 가정·연애관계·직장·온라인 공간 등 일상의 거의 모든 장면에 스며 있는 구조적 폭력입니다. 이를 바꾸기 위해 국제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의 날, 성폭력·가정폭력 반대의 날,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인식 제고 주간 등 다양한 국제 기념일을 제정해 왔습니다. 이 기념일들은 ①폭력을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 드러내고, ②법·제도 개정을 촉진하며, ③피해자 중심 관점을 확산시키고, ④남성·청소년·시민사회의 참여를 넓히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동시에, 상징적 행사에 그치지 않고 실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과제가 남아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젠더 폭력을 ‘보이게’ 만든 국제 기념일의 역할
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이 등장한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폭력이 “숨겨진 현실”로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래도록 가정폭력, 연인 간 폭력, 직장 내 성희롱, 데이트 성폭력, 온라인 성착취 등은 “집안 문제”, “사적인 일”, “둘 사이에서 알아서 해결할 일”로 여겨졌습니다.
피해자는 “왜 그때 거절하지 않았냐”, “왜 그 관계를 계속 유지했냐”, “왜 이제 와서 말하냐”는 2차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국가와 사회는 개입을 꺼리거나 방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은 이런 침묵을 깨기 위한 시도입니다. 특정한 날짜를 정해 피해생존자의 경험을 드러내고, 통계와 사례를 공개하며, “이것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함으로써 담론의 장을 열어 온 것입니다.
2. 자선과 보호에서 ‘권리와 책임’의 언어로
초기의 젠더 폭력 관련 기념일과 캠페인은 종종 “불쌍한 피해 여성을 보호하자”는 자선·보호의 언어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국제 기념일 메시지의 중심은 다음과 같이 이동했습니다.
1) 피해자 보호 → 인권 보장
젠더 폭력은 “도와줄 만한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국가가 막아야 할 인권 침해”로 규정됩니다. 따라서 수사·재판에서의 2차 피해 방지, 보호명령·피난처·상담 지원, 경제·주거·일자리 지원 등은 선택적 복지가 아니라 권리 보장의 일부로 이해됩니다.
2) 가해자 개인의 일탈 → 구조와 권력의 문제
국제 기념일 담론은 “나쁜 남자 한 명의 문제”를 넘어서 가부장제, 성별 권력관계, 차별적 문화, 미디어 재현 방식, 법·제도의 허점 등을 함께 지적합니다. “모든 남성이 가해자는 아니지만, 남성 중심 문화가 폭력을 가능하게 한다”는 구조적 시각이 강조됩니다.
3) 여성 보호 → 다양한 젠더 정체성의 권리
초기에는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 주목받았다면, 이제는 성소수자, 성별 이분법에 포섭되지 않는 사람들, 이주여성, 장애여성, 청소년·노인 등 교차적 차별을 겪는 집단의 현실도 함께 다루어집니다.
이처럼 국제 기념일은 “여성을 불쌍히 여기자”가 아니라 “모든 젠더가 폭력 없이 살 권리를 보장하자”는 언어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3. 법·제도 변화와 사회운동을 이끈 국제 기념일
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은 여러 나라에서 실제 법과 제도 변화를 이끌어 내는 촉매제 역할을 했습니다.
1) 가정폭력·성폭력에 대한 법 제정과 개정
많은 국가에서는 젠더 폭력 관련 국제 캠페인과 인권기구의 권고를 계기로 가정폭력을 독립 범죄로 규정하거나, 혼인 관계 여부와 상관없이 성폭력을 처벌하도록 법을 바꾸고, 스토킹·데이트 폭력·디지털 성범죄 등을 새로운 범죄 유형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2) 국가 행동계획과 정책 프레임
국제 기념일 전후로 국가 차원의 젠더 폭력 방지 전략, 피해자 지원 체계, 경찰·검찰·법원의 대응지침이 발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젠더 폭력을 단순 형사사건이 아니라 교육·복지·보건·주거·노동 등 여러 부문을 관통하는 정책 의제로 위치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3) 시민운동과 미투 운동 등과의 결합
젠더 폭력 반대 기념일과 미투 운동, 온라인 해시태그 캠페인, 대학·직장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특정 날짜에 맞춰 피해자 연대집회, 거리행진, 온라인 고발과 연대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개인의 용기”가 “집단의 힘”으로 조직되는 과정이 만들어졌습니다.
4. 일상 속 권력 관계를 바꾸는 교육과 인식 변화
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이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영역 중 하나는 교육과 인식입니다.
1) 학교와 대학교에서의 젠더·폭력 교육
기념일을 계기로 초·중·고·대학에서 데이트 폭력, 온라인 성폭력, 스쿨 미투, 동의(consent) 개념, 디지털 시민성 등의 주제를 다루는 수업과 캠페인이 진행됩니다. 특히 “동의 없는 모든 성적 접촉은 폭력”이라는 기준은 젠더 폭력 교육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2) 직장과 조직문화 변화
기업·공공기관·시민단체는 젠더 폭력 관련 기념일을 계기로 성희롱 예방 교육, 내부 신고·상담 시스템 정비, 회식·업무 관행 점검 등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농담’으로 포장되던 성차별 발언, 권력관계에 기반한 술·식사·여행 강요 등은 점차 문제적 행위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3) 미디어와 대중문화 속 재현 방식의 변화
기념일 캠페인에서는 “피해자 탓하기(victim blaming)” 보도, 선정적 범죄 재연, 폭력 관계를 로맨스처럼 포장하는 드라마·영화 서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이 과정에서 언론 가이드라인과 콘텐츠 심의 기준이 개선되기도 하고, 제작자들도 점차 동의·존중·평등을 반영한 서사를 고민하게 됩니다.
요컨대, 국제 기념일은 “범죄 통계”를 넘어 학교·직장·문화 전반의 권력 관계를 되묻는 계기로 작동합니다.
5. 상징을 넘어 실질 변화로 가기 위한 과제
그렇다고 해서 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들도 분명합니다.
1) 하루짜리 캠페인으로 축소되는 위험
해마다 비슷한 포스터·슬로건·행사가 반복되면 “그날만 지나면 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념일에 발표된 약속과 정책이 이후 1년 동안 실제로 어떻게 이행되었는지 다음 해에 다시 점검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2) 사회·경제적 조건과의 연결 부족
젠더 폭력은 빈곤, 주거 불안, 비정규·플랫폼 노동, 이주·난민 신분, 장애·인종·계급 차별 등과 결합해 더 취약한 상황을 만듭니다. 그럼에도 기념일 논의가 “의식 개선”에만 치우칠 경우, 구조적 불평등을 바꾸려는 노력은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3) 남성·소년과의 대화를 어떻게 열 것인가
젠더 폭력은 주로 남성이 가해자로, 여성이 피해자로 등장하지만,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접근은 방어적 반발만 키울 위험이 있습니다. 국제 기념일은 남성·소년을 “바뀌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 함께 책임을 나눌 동료 시민으로 초대하는 교육과 대화의 자리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4) 온라인·디지털 환경의 급격한 변화
딥페이크, 불법촬영물 유포, 사이버 스토킹, 알고리즘을 통한 혐오 확산 등 새로운 형태의 젠더 폭력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념일 담론도 오프라인 폭력에 머물지 않고 디지털 권리와 플랫폼 책임 문제를 적극적으로 포함해야 합니다.
결론: ‘기념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점
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은 피해자의 침묵을 깨고, 사회 구조의 문제를 드러내며, 법·제도·문화의 변화를 촉진해 온 중요한 계기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한 해에 한 번 “마음 아픈 이야기”를 소비하는 시간이 될지, 아니면 “내년에는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약속과 점검의 날이 될지는 결국 각 사회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젠더 폭력 반대 국제 기념일의 진짜 의미는, 그날이 지나간 후 학교·가정·직장·온라인 공간에서 폭력에 대한 우리의 기준과 행동이 실제로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있습니다.
기념일은 끝이 아니라, 다음 변화를 준비하는 시작점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