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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가 만든 새로운 세계 기념일

actone 2025. 12. 3. 07:30

SNS가 만든 새로운 세계 기념일

달력을 보면 국가가 정한 공휴일과 국제기구가 제정한 공식 기념일이 먼저 떠오르지만, 실제 우리의 일상은 SNS가 만들어 낸 수많은 ‘비공식 기념일’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밸런타인데이·할로윈처럼 이미 상업화된 날은 물론, ‘뽀뽀데이’, ‘참치데이’, ‘고양이의 날’, ‘내 MBTI 공개하는 날’, ‘옛사진 올리는 날’ 같은 각종 기념일 상당수가 사실상 SNS에서 확산된 결과입니다. 이런 날들은 법적 지위나 국제기구의 결의 없이도, 해시태그와 밈, 챌린지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이 글에서는 SNS가 어떻게 새로운 세계 기념일을 만들어 내는지, 그 형성과 확산 방식, 긍정적·부정적 영향, 그리고 우리가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캘린더가 아닌 타임라인이 만든 ‘기념일’

전통적인 기념일은 국가·종교·국제기구 같은 ‘위로부터의 권위’가 정해 왔습니다. 특정 역사적 사건, 종교적 축일, 전쟁과 평화, 인권·환경 의제가 정치적·사회적 논의를 거쳐 공식 기념일로 제도화되는 구조였습니다. 반면 SNS가 만든 새로운 기념일은 출발부터 다릅니다. 누가 정했는지 모를 정도로 작은 농담, 광고 문구, 팬덤 문화, 인플루언서의 게시글, 커뮤니티의 이벤트가 어느 순간 ‘날짜’와 결합하며 기념일의 형태를 띠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음식 브랜드가 “○월 ○일은 치킨데이!”라고 캠페인을 진행하면, 처음에는 광고 문구에 불과하던 말이 SNS에서 해시태그와 함께 따라 쓰이며 하나의 ‘날’로 자리 잡습니다. 팬덤 문화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이돌·크리에이터의 데뷔일, 특정 곡이 발매된 날, 유명 밈이 처음 등장한 날 등을 팬들이 자발적으로 기념하며, 해마다 팬아트·기부·스트리밍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이렇게 생긴 기념일은 공식 달력에는 없지만, 팬덤과 커뮤니티 안에서는 국가 공휴일 못지않은 의미를 가질 때도 있습니다.

SNS 기반 기념일의 특징은 속도와 유연성입니다. 어떤 날은 한 해 반짝하다 사라지고, 어떤 날은 2~3년 사이에 전 세계로 확산되며 ‘국제적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앞에 ‘세계(World)’라는 단어가 붙는 경우도 많지만, 실제로는 특정 언어권·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문화일 때가 많습니다. 중요한 건 공식성과 법적 효력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날을 인지하고 타임라인에서 함께 반응하느냐입니다. 캘린더보다 타임라인이 기념의 기준이 되는 셈입니다.

해시태그, 밈, 챌린지가 만드는 참여형 기념문화

SNS 기념일이 빠르게 퍼지는 핵심 메커니즘은 해시태그와 밈, 챌린지 구조입니다. 전통적인 기념일이 “알리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이 비교적 분리되어 있다면, SNS 기념일은 시작부터 참여를 전제로 합니다.

먼저 해시태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알려 주는 간단한 신호입니다. #세계고양이의날, #치킨데이, #커플데이, #추억팔이사진데이 같은 태그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암시합니다. 사진 업로드, 특정 문장 복붙, 같은 질문에 답하기 등 참여 방식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밈과 챌린지는 여기에 놀이와 경쟁의 요소를 더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 vs 현재 사진 올리기”, “내 반려동물 자랑하기”, “특정 노래에 맞춰 춤추기” 같은 포맷은 날짜와 결합하는 순간 하나의 기념일 의례로 작동합니다. 누가 먼저 정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계정이 같은 포맷을 따라 하면서, 그날의 타임라인은 비슷한 형식의 게시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인스타그램·틱톡의 릴스, 유튜브 쇼츠 등 숏폼 영상 플랫폼은 이런 ‘포맷 복제’를 특히 잘 확산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참여형 기념문화는 몇 가지 특징을 보여 줍니다. 국경을 상대적으로 쉽게 넘습니다. 텍스트보다 이미지·영상·음악이 중심이기 때문에, 언어가 달라도 같은 챌린지에 참여하기 쉽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반려동물 기념일에 참여하고, 누구는 환경 캠페인 기념일에, 또 다른 이는 팬덤 기념일에 열심입니다. 내가 어떤 날에 반응하는지 자체가 나의 취향과 가치관을 보여 주는 신호가 됩니다. 그리고 기후·인권·정치·보건과 관련된 날에도 해시태그와 사진,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가벼운 연대’의 형태를 띱니다.

이처럼 SNS가 만든 기념일은 ‘누가 지정했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같은 형식으로 참여하는가’가 중요해지는 세계를 보여 줍니다.

상업화와 피로감: 기념일의 홍수 속에서

SNS 기반 기념일이 늘어나면서, 긍정적인 면과 함께 여러 문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장 뚜렷한 것은 상업화와 피로감입니다. 많은 기업과 브랜드가 SNS 기념일을 마케팅 기회로 활용하면서, 거의 매일이 무언가를 사야 할 것 같은 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데이니까 할인”, “이 기념일 기념 한정 굿즈”, “기념일 해시태그 달면 추첨을 통해 경품” 같은 문구는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념일이 가진 본래 의미가 희석되거나, 처음부터 의미보다는 판매를 위해 설계된 ‘가짜 기념일’이 양산되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대기업의 마케팅으로 처음 등장해 SNS에서 소비되면서, 마치 오래된 전통처럼 포장되기도 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오늘도 무언가를 사야 하나”라는 피로감, “기념일까지 상업화되는구나”라는 냉소가 함께 쌓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기억과 관심의 분산입니다. 환경·인권·보건처럼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다루는 공식 국제기념일이 있어도, 같은 날 혹은 비슷한 시기에 수많은 SNS 기념일이 타임라인을 채워 버리면, 상대적으로 무거운 주제는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지한 의제를 다루려던 날이 밈과 개그, 상업 콘텐츠와 섞여 가벼운 이벤트처럼 소비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SNS 기념일은 참여하지 않는 사람에게 미묘한 압력을 주기도 합니다. 커플 기념일, 가족·우정 관련 기념일처럼 관계를 드러내는 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그 관계가 없거나 단절된 사람들에겐 소외감과 비교 의식이 커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빠져 있는 느낌”은 SNS 시대 특유의 정서이고, 기념일의 홍수는 이 감정을 더 자주 자극합니다.

SNS 기념일이 보여 주는 새로운 ‘세계 공동체’의 단면

그럼에도 SNS가 만든 새로운 세계 기념일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단서입니다. 기존의 국가·종교·이념 기반 공동체를 넘어서, 취향·관심사·경험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공동체가 기념일을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게임, 드라마, 밴드, 밈을 좋아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날 “우리만의 기념일”을 만들어 축하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만의 작은 세계이지만, 동시에 언어와 국경을 넘는 새로운 종류의 세계 공동체입니다. 또 여성·성소수자·장애인·정신건강 당사자 등 기존 사회에서 주변화되었던 집단은, 자신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중심에 둔 비공식 기념일을 만들어 서로를 확인하고 지지하기도 합니다.

공식 국제기념일이 “위에서 내려오는 공통 의제”라면, SNS 기념일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삶의 조각”을 드러냅니다. 이 둘은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보완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공식 기념일이 SNS를 통해 더 넓게 알려지고,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늘어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SNS 기념일을 단순히 가볍고 하찮은 현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싶은지를 보여 주는 문화적 텍스트로 읽을 것인지입니다. 비판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되,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욕구, 상상력을 읽어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결론 – 누가 무엇을 ‘기념할 권리’를 가지는가

SNS가 만든 새로운 세계 기념일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무엇을 기념할 권리를 가지는가?” 예전에는 국가와 종교, 국제기구 같은 거대한 주체만이 기념일을 만들 수 있었다면, 이제는 평범한 개인과 작은 커뮤니티도 자신의 경험과 가치를 기념하는 날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기념일의 권력이 분산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나 권리가 넓어질수록 책임도 함께 무거워집니다. 우리가 만드는 기념일이 단지 소비를 부추기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장치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연대와 성찰, 배움을 촉발하는 시간이 될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SNS 타임라인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의 날’ 가운데, 어떤 날에 왜 참여하고, 어떤 날은 거리를 두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 그 작은 선택이 쌓여, 앞으로 어떤 기념일이 살아남고 어떤 기념문화가 자리 잡을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기념일은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만은 아닙니다. SNS 시대의 기념일은, 우리가 함께 만드는 이야기이자, 우리가 어떤 세계를 꿈꾸는지 보여 주는 집합적인 메모와도 같습니다. 그 메모 위에 무엇을 쓸 것인지, 이제는 우리 각자의 차례입니다.